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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이야기 42> 호수에 잠긴 원효의 흔적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이야기 42> 호수에 잠긴 원효의 흔적

서동철 기자
서동철 기자
입력 2015-11-24 14:43
업데이트 2015-11-24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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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경주박물관에 가면 뒷뜰 한켠에 압도적인 크기의 삼층석탑이 버티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크기에서 느껴지는 위압감에 더하여 주변에 세워진 불국사 석가탑과 다보탑의 모조품은 범접할 수 없는 품격이 느껴진다. 고선사(高仙寺)터 삼층석탑이다.

 고선사는 경주 시내에서 감은사가 있는 동해로 넘어가는 토함산 중턱에 있었다. 고선사 탑을 이야기하자면 감은사 쌍탑도 언급하기 마련이다. 통일신라시대 전형적인 삼층석탑은 고선사 탑과 감은사 탑에서 시작해 석가탑에서 완성됐기 때문이다.

국보 제38호 경주 고선사터 삼층석탑(문화재청 사진)
국보 제38호 경주 고선사터 삼층석탑(문화재청 사진)
 고선사탑이 토함산 서쪽 기슭을 떠나 경주박물관에 자리잡은 것은 1975년이다. 경주시내 안팎에 생활용수와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한 덕동댐이 지어지면서 절터는 수몰됐다. 고선사 터의 발굴조사가 끝나고 삼층석탑은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다.

 고선사는 원효대사(617~686)가 머문 사찰이었다. 1914년 원효의 일대기가 새겨진 서당화상비의 깨어진 아랫부분이 절터에서 수습되어 고선사의 내력이 어느 정도 밝혀지게 됐다. 원효는 어릴 적 이름이 서당(誓幢)이어서 서당화상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국립경주박물관 마당에 옮겨진 고선사 석물들. 왼쪽 앞에 보이는 것이 서당화상비가 세워져 있던 귀부다. 거북이의 머리 부분은 깨져나간 모습이 보인다.
국립경주박물관 마당에 옮겨진 고선사 석물들. 왼쪽 앞에 보이는 것이 서당화상비가 세워져 있던 귀부다. 거북이의 머리 부분은 깨져나간 모습이 보인다.
 서당화상비의 왼쪽 윗부분은 어찌된 일인지 1968년 경주시내의 동천사터로 알려진 동네의 민가에서 발견됐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제지공장에 있었다고 한다. 지금 비석은 경주박물관이 아랫부분은 동국대박물관이 윗부분을 소장하고 있다.

 내용은 출생 수학 저술 교화 입적 추모의 순으로 적혀 있다. 유성이 어머니의 몸으로 들어오는 태몽과 해산 때 오색 구름이 자욱했다는 대목은 ‘삼국유사’ 기록과 일치한다. 신출귀몰했던 대사는 드러내지 않아도 자연히 드러났고, 지방을 두루 교화하고 수공(垂拱) 2년(686) 혈사(穴寺)에서 일흔의 나이로 입적했다고 적었다. 수공은 측천무후의 연호다

 고선사는 금당 구역과 탑 구역이 나란한 형태를 가진 국내 유일의 사찰이다. 동쪽의 금당 구역은 금당을 중심으로 앞에는 중문, 뒤에는 강당이 자리잡았고 사방을 회랑이 둘러싸고 있었다. 탑 구역은 금당 구역보다 규모는 작지만 역시 회랑을 두른 모습이었다.

동국대박물관이 소장한 서당화상비의 왼쪽 윗부분.
동국대박물관이 소장한 서당화상비의 왼쪽 윗부분.
 금당 구역과 탑 구역이 병렬하는 구조는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 금당 구역을 먼저 지었는데, 훗날 석탑이 필요해지만 추가 조성했다는 것이다. 거대한 규모의 탑을 새로 지어야 했을 이유가 바로 원효대사의 입적이라는 설명이다.

 고선사터에는 삼층석탑말고도 서당화상비의 귀부와 석등 대석, 건물의 하부를 이루었을 주춧돌과 장대석이 여럿 남아있었다. 이것들도 모두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다. 그것도 고선사 가람구조와 관계없이 무의미한 형태로 놓여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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