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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잡학박사, 현대인을 초대하다

17세기 잡학박사, 현대인을 초대하다

조희선 기자
조희선 기자
입력 2018-05-11 22:36
업데이트 2018-05-12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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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말 청초 문학·연극·출판인 ‘이어’ 미용·패션·음식·웰빙 등 책 한 권에 “머리 감은 수건으로 얼굴 닦지마라 잠은 백 가지 병 치료하는 신령한 약” 지금도 참고할 만한 삶의 지혜 가득

쾌락의 정원/이어 지음/김의정 옮김/글항아리/792쪽/3만 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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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는 봄, 가을, 겨울엔 일을 하고 가혹한 더위를 몰고 오는 여름에는 잘 쉬어야 지극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고 했다. 그림은 중국 원나라의 화가인 유관도가 피서를 즐기고 있는 남성을 묘사한 ‘소하도’.  글항아리 제공
이어는 봄, 가을, 겨울엔 일을 하고 가혹한 더위를 몰고 오는 여름에는 잘 쉬어야 지극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고 했다. 그림은 중국 원나라의 화가인 유관도가 피서를 즐기고 있는 남성을 묘사한 ‘소하도’.
글항아리 제공
잡다한 사물에 대한 사용법과 인테리어 활용법, 좋은 식재료 구별법, 각종 취미 생활에 웰빙 비법까지. 삶을 윤택하게 하기 위한 온갖 철학이 책 한 권에 담겼다. 만물에 대한 세세한 정보를 조목조목 나열한 이 ‘잡학 백과 대사전’의 저자는 17세기 명말 청초 시대의 작가 겸 연극 연출가다. 그런데도 그 시절 정보들은 현대에도 꽤 참고할 만하다. 한 번 뿐인 인생 잘 먹고 잘 살았던 한 남자가 초대하는 쾌락의 정원은 어떤 모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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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이 바뀐 혼돈의 시기, 명말 청초 이어(李漁·1611~1685)가 쓴 ‘한정우기’를 우리말로 처음 옮겼다. ‘한정’(閑情)은 공적 직무를 벗고 느끼는 여유를, ‘우기’(偶奇)는 즉흥적 감정을 붓 가는 대로 기록했다는 의미다.

그의 잡학적 관심은 문학, 연극, 출판인 등 ‘종합예술인’으로 산 그의 이력이 한몫한 듯싶다. 지금으로 치면 19금 호색소설 ‘육포단’(肉蒲團)도 그의 작품이다.

극단을 운영했던 이어는 수십명의 식솔을 건사하기 위해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자금을 융통했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눈동냥 귀동냥했으니 넓고 얕은 지식이 풍부해진 건 당연지사. 일생의 경험을 총괄한 이 야심작도 그래서 탄생했다.

전체 8장으로 구성된 ‘한정우기’는 희곡 이론을 제외한 나머지 6장에 미용·패션(성용부), 주거 공간(거실부), 집안 소품(기완부), 음식(음찬부), 식물 재배(종식부), 웰빙(이양부) 등 현대에도 관심 가질 만한 주제들을 할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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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는 피부가 하얀 여인은 어떤 옷을 입어도 돋보인다고 강조했다. 그림은 중국 원나라 순제의 숙비인 과소아의 초상. 피부가 투명할 정도로 희고 은은한 붉은빛이 돌았다고 한다.  글항아리 제공
이어는 피부가 하얀 여인은 어떤 옷을 입어도 돋보인다고 강조했다. 그림은 중국 원나라 순제의 숙비인 과소아의 초상. 피부가 투명할 정도로 희고 은은한 붉은빛이 돌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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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할 만한 부분은 책 앞머리를 차지한 ‘성용부’다. 여성의 외모를 자태, 피부, 눈과 눈썹, 손과 발, 머리 모양, 화장법 등 여러 측면에서 분석했다. 저자가 남성인데도 여성의 미적 가치에 대한 식견이 여성의 입장에서 봐도 놀라울 만큼 세세하다.

이어는 머릿기름 때문에 화장이 안 받으니 머리를 감은 수건으로 얼굴을 닦지 말고, 여러 가지 옷을 받쳐 입을 수 있는 활용도 높은 검은색 재킷을 하나쯤 갖추라고 조언한다. 지금으로 치면 웬만한 ‘연예인 코디네이터’ 뺨칠 정도다.

신발을 신을 때 땅 색깔과 같은 색깔을 신으면 신발의 멋을 살릴 수 없다는 깨알 잔소리도 잊지 않는다. 하지만 여성을 그저 남성이 감상하는 미적 대상으로만 인식하는 시각은 고루하고 그 시대를 벗어나지 못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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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는 잠이야말로 비장과 위를 튼튼하게 하고 뼈와 근육을 굳건하게 하는 비결이라고 강조했다. 그림은 북송의 도가 학자인 진단이 잠자고 있는 모습을 그린 그림. 도교를 수련한 진단은 한 번 잠들면 몇 달씩 깨지 않았다고 한다. 글항아리 제공
이어는 잠이야말로 비장과 위를 튼튼하게 하고 뼈와 근육을 굳건하게 하는 비결이라고 강조했다. 그림은 북송의 도가 학자인 진단이 잠자고 있는 모습을 그린 그림. 도교를 수련한 진단은 한 번 잠들면 몇 달씩 깨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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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풀어놓는 행복한 삶에 대한 인식은 놀라울 만치 지금의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닮아 있다. 이어는 삶이 풍요하려면 재물보다는 절제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소유한 물건만 잘 활용해도 쾌적하게 살 수 있고, 행복하고 싶다면 스스로 만족하고 살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그가 평생의 낙으로 꼽은 건 제철 게를 먹고 수선화를 감상하는 것이었다.

바쁜 일상에 치여 건강관리에 소홀한 현대인들이 참고할 만한 내용도 눈에 띈다. 저자는 잠이 보약이라고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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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 문양의 휘장을 단 침대. 잠을 중요하게 생각한 이어는 침상을 조강지처에 비교할 만큼 중요한 사물로 꼽았다.  글항아리 제공
매화 문양의 휘장을 단 침대. 잠을 중요하게 생각한 이어는 침상을 조강지처에 비교할 만큼 중요한 사물로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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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잠은 한 가지 질병을 치료하는 약이 아니라, 백 가지 병을 치료하고 만민을 구제하는, 시험하여 효험이 없는 곳이 없는 신령한 약”이라고 잠의 가치를 기술했다. 잠자는 침상을 조강지처에 빗댈 만큼 중요한 물건으로 꼽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음식을 탐닉하면 질병에 노출되기 쉽다는 지적에서부터 육식보다는 채식을 하고 자연에 가까운 음식을 먹으라고 한 건 온갖 가공식품에 길들여진 현대인의 식습관을 나무라는 듯하다. 시대적 배경이 다른 탓에 책의 모든 내용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건축, 가구, 의복, 음식, 장신구, 성생활 등 전 영역에서 자신만의 ‘소확행’을 추구했던 예술가의 시선은 무척 흥미롭다. 번역서지만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책 말미에 한자 원문도 실려 있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2018-05-12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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