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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정의 아시아의 美] 시는 그림같이, 그림은 시같이

[강희정의 아시아의 美] 시는 그림같이, 그림은 시같이

입력 2019-11-18 17:10
업데이트 2019-11-19 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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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맹부 ‘사유여구학도’ 부분, 비단에 채색,  27.4×116.3㎝, 프린스턴대학 박물관
조맹부 ‘사유여구학도’ 부분, 비단에 채색,
27.4×116.3㎝, 프린스턴대학 박물관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이자 화가인 왕유(王維ㆍ699~759)는 “그림은 소리 없는 시, 시는 소리 있는 그림”(畵卽無聲詩 詩卽有聲畵)이라 했다. 그는 당대 최고 문인 중 하나로 서정시를 형식적으로 완성했다는 평을 들었고, 후에 남종화의 시조로 받들어졌다. 북송의 소식(蘇軾ㆍ1036~1101)은 왕유의 그림을 보고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詩中有畵 畵中有詩)고 찬사를 보냈다. 문인화의 바탕이 된 이론이다. 문인화는 사물을 똑같이 그리는 사실주의적인 태도보다 자기 자신의 뜻을 드러내는 표현 수단으로서의 그림을 중시했다. 겉으로 드러나는 외형보다 내면의 뜻이 우선이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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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정 서강대 동아연구소장
강희정 서강대 동아연구소장
중국의 회화이론은 그림과 글씨의 근원이 같다는 ‘서화일치론’(書畵一致論)에서 출발했다. 이는 붓과 먹으로 이뤄지는 그림과 글씨의 붓놀림이 같다는 데서 나왔다. 서예를 평가하는 방식으로 그림을 평가하고 그림의 예술적 가치가 높다고 인정하게 된 것도 여기서 시작했다. 이미 4세기부터 서예가 높이 평가되던 현실에서 점차 그림도 그 못지않은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이를 발달시켜 그림과 글씨의 근원이 같다는 ‘서화동원론’을 주장한 것이 조맹부다. 하지만 ‘시 속 그림, 그림 속 시’라는 말은 서예가 아니라 시를 겨냥한 것이다. 그림이 단지 붓놀림의 문제가 아니라 그림에서 시를 연상시킬 만큼 문학적 소양과 학식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모름지기 화가는 ‘소리 없는 시’를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지적 수양을 쌓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냉정하게 말해 이 이론은 시와 그림, 서예를 통해 여가를 즐기던 문인들의 선민의식이 배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조맹부(趙孟?)의 ‘사유여구학도’(謝幼輿丘壑圖ㆍ1286?)에서는 시적 정취가 물씬 배어 나온다. 화면 한가득 옅은 녹색의 구릉이 펼쳐지고, 띄엄띄엄한 나무와 강, 강가 둔덕과 바위는 공중에 떠 있듯 비현실적이다. 가늘고 세밀한 붓질, 녹색과 갈색만을 쓴 화면은 평온하고 절제됐다. 당대 산수화처럼 바위나 산의 표면 질감을 나타내기 위한 붓놀림(준법)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보는 이의 감정을 자극하는 어떤 표현도 없다. 그저 고졸하고 몽환적인 구릉 사이에 탈속한 듯이 사유여가 느긋하게 앉아 있을 뿐. 이 그림은 4세기의 사대부 사유여, 즉 사곤(謝鯤ㆍ281~323ㆍ자 유여)의 일화를 묘사한 것이다.

사유여는 죽림칠현처럼 세속에 구애받지 않고 은둔한 인물이다. 당시 동진의 명제가 은거 중인 사유여에게 조정의 대신 유량과 유여 자신을 비교해 보라고 했다. 이에 사유여는 산중에서 낚시하는 즐거움을 아는 자신이 출사한 유량보다 한 수 위라고 답했다. 은일의 즐거움을 빗댄 답이었다. 같은 시대 화가 고개지는 언덕과 구릉[丘壑] 사이에 앉아 있는 사유여의 모습을 그렸다고 한다. 탈속과 세속의 선택을 고민하는 사대부들에게 유명한 일화였던 것이다. 몽골족의 원나라에서 여느 한족 사대부와 달리 출사를 택했던 조맹부 역시 사유여를 통해 은둔에 대한 자신의 동경을 담담하게 그렸다. 옛 그림의 화법을 되살려서 말이다.

‘사유여구학도’ 속에 펼쳐진 ‘시의 행간’은 넓기만 하다. 어느덧 한 해는 저물어 가고 내년 총선 준비로 분주하다. 사유여를 좇을 것인가, 조맹부를 따를 것인가로 번잡한 세밑을 맞는 이들이 적지 않을 듯싶다. 누구를 표방하든, 무엇을 좇고 따르든 탈속은 못 하더라도 시도 그림도 없는 삶만은 경계하고 또 경계할 일이다.

2019-11-19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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