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날줄] 라면/박홍기 논설위원

[씨줄날줄] 라면/박홍기 논설위원

입력 2011-03-02 00:00
업데이트 2011-03-02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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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릿고개란 말이 있다. 사전적 의미로는 ‘묵은 곡식이 떨어지고 아직 보리가 여물지 않은 5~6월, 농가의 끼니 때우기가 가장 어려운 때’이다. 일제 강점에서 해방된 이후 1970년대까지 서민들이 겪어야 했던 가난, 굶주림을 상징하는 용어다. 우리나라 라면의 역사는 배고픔과 맞물려 있다.

라면은 1963년 9월 15일 처음 국내에서 10원에 출시됐다. 삼양라면이다. 1961년 삼양식품을 설립한 전중윤 명예회장이 기아(飢餓)로부터의 탈출이라는 목표 아래 회사 설립 2년 만에 선보인 제품이다. 전 명예회장은 당시 남대문시장을 지나다 시민들이 미군들의 음식찌꺼기로 만든 ‘꿀꿀이죽’을 사먹기 위해 길게 줄을 선 광경을 보고는 식량자급문제 해결의 시급성을 절감했다. 이후 일본 묘조(明星)라면의 오쿠이(奧井) 사장을 끈질기게 설득, 시설과 기술을 이전받았다.

국민, 즉 소비자들은 초기엔 시큰둥했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생소한 제품이었던 까닭이다. 무료 시식 등 라면 알리기에 나선 지 1년쯤 지나자 소비자들의 반응이 나타났다. 그 결과 6년 만에 초창기 매출액과 비교하면 300배의 성장을 이뤘다. 굶주림에 시달리던 배를 채워주는 ‘제2의 쌀’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최근 라면 매출이 크게 늘고 있다. 특히 편의점 라면 매출이 눈에 띌 만큼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세븐일레븐·바이더웨이에 따르면 전국 4800여개점의 매출을 분석한 결과, 지난달 7~27일의 컵라면과 봉지라면의 매출이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각각 36.4%와 46.8% 늘었다는 것이다. 치솟는 물가로 비싸진 식당 음식이 부담스러워진 탓인지 대학 구내에 입주해 있는 편의점 27곳의 컵라면 매출도 전년 대비 52.2%나 늘었다. 최근의 라면 매출 급증은 결코 바람직스럽지 않다. 서민들의 삶이 그만큼 팍팍해졌다는 방증이어서다.

물가 상승폭이 장난이 아니다. 허리띠를 졸라맨 직장인들은 값싼 음식점을 전전하는 실정이다. 점심을 뜻하는 런치와 유목민이라는 노마드를 합친 ‘런치노마드족’ 이라는, 싼 식당을 찾아 떠도는 젊은이들도 생겨났다. 그제 통계청이 발표한 지난해 하반기 1분위(소득하위 20%)의 엥겔지수는 22.5%로 6년 만에 최고치였다. 엥겔지수가 높을수록 살림이 힘들어진다는 뜻이다. 21세기형 보릿고개 같다. 전 명예회장이 추구했던 ‘먹는 데 족하면 천하가 태평하다’라는 식족평천(食足平天)의 의미가 무색하기만 하다. 대한민국은 심각한 양극화에 직면해 있다.

박홍기 논설위원 hkpark@seoul.co.kr
2011-03-02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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