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선 체육부 선임기자
32개국 대표팀이 우승을 다투지만 적지 않은 이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월드컵 대회는 국가대항전이 아니라 협회대항전이다. 각국 대표팀의 유니폼에 국기 대신 축구협회 마크가 새겨진 것을 봐도 그렇다.
그런데도 월드컵은 국가들의 각축장으로 여겨져 왔다. 심지어 1934년 이탈리아월드컵은 무솔리니가 파시즘의 정당성을 전 세계에 확인하는 기회로 악용됐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각국의 위정자들도 알게 모르게 대회를 정치적으로 이용해 왔다.
TV 속의 축구공을 눈으로 좇으며 우리는 ‘대~한민국’을 외칠 것이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애국심에 불타오를지 모른다. 그리고 그 선연한, 누군가에게는 뜨악할 수 있는 감정을 선수들에게 강요할지 모른다.
홍명보 감독은 11일 미국 마이애미 전지훈련을 결산하며 “축구에서 정신력을 강조하는데 대체 정신력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선수들에게 투혼이 없다는 비판이 쏟아지는 것을 의식한 발언으로 보인다. 그가 언급한 ‘정신력’은 대표팀 유니폼에 새겨진 ‘투혼’, 나아가 ‘애국심’으로 옮겨도 무방하지 않을까.
또 기성용이 튀니지와의 평가전 때 ‘왼손 경례’를 했다가 ‘국가대표로서 최소한의 자세를 갖추지 못했다’고 질타당했는데, 과연 온당한 성토였는지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지난 5일 에콰도르와의 평가전에 출전한 잉글랜드 대표 11명 중 6명은 국가인 ‘신이여 여왕을 돌보소서’를 따라 부르지 않고 입만 달싹였다고 손가락질을 받았다. 로이 호지슨 감독이 사흘 전 “(국가를 대표해서) 그라운드에서 상대를 만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인데 대표팀 선수 중에는 가슴에 손을 얹고 국가를 크게 부르지 않는 이들이 있는 것 같다. 우리도 소집 때부터 (국가를) 부르자”고 당부했는데도 이를 무시했다는 비난이었다.
국가를 대표한다는 영예에다 훈련·출전·승리수당 등 금전적 이득까지 챙기는데 그 정도도 못하느냐고 타박할 수 있겠지만 애국심을 드러내라고 선수들에게 어느 선까지 강요할 수 있는지는 따로 생각해 볼 일이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의 해리 왈롭은 ‘(국민들도) 국기를 흔들며 응원할 수 있지만 줄지어 서서 여왕에 대한 충성심을 노래로 표현하라고 하면 대다수는 불편해질 것’이라고 적었다.
하물며 국가주의 사고의 뿌리가 깊은 일본 법원도 입학식이나 졸업식 때 기미가요를 제창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사상의 자유를 침해한 것이라고 판결하고 있다. 왈롭은 “태국에선 매일 오전 8시, 오후 6시 모든 국민이 멈춰 서 국가를 부른다. 그런데 이 나라는 월드컵보다 더 규칙적으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다”고 꼬집었다.
2002 한·일월드컵 때 거리를 뒤덮은 붉은 물결에 섬뜩한 느낌을 가졌다면 그건 우리가 국가주의나 민족주의에 감춰진 위험성을 감지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월드컵에 지나치게 국가나 집단의 논리를 투영시키는 건 온당치 않은 일이다.
bsnim@seoul.co.kr
2014-06-12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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