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밑줄’은 절박이고, 비장이었다. 더는 들어갈 빈자리가 없을 듯한 머릿속에 어떻게든 꾹꾹 욱여넣으려 긋고 또 그었다. 과식한 머리가 ‘망각’이라는 생존기제를 동원해 어제 집어넣은 영어단어를 뱉어내면 낼수록 밑줄은 두 줄, 세 줄로 늘었고, 끝내 온 쪽이 밑줄로 이어지기도, 그러다 말기도 했다.
한참을 걸어 더는 밑줄 그어가며 머리를 괴롭힐 일이 없어진 지금, 어쩌다 지인에게서 빌린 책에 생각지도 않던 덤이 딸려 온다. 바로 며칠 전 그가 그었을 게 분명한 밑줄이다. 번잡해진 지 오랜 머리가 아니라 스산하고, 갈수록 궁기가 커가는 가슴에 담았을 밑줄…. 하고많은 구절 가운데 그는 왜 여기에 밑줄을 긋고 선뜻 시린 마음을 내주었을까. 같은 글을 읽으며 그는 무엇을 새기고, 나는 뭘 보고 있는가.
책 속의 그를 좇다가 만난 밑줄의 그가 되어 좇던 그를 다시 좇아도 보고, 살짝 비켜서 밑줄의 그를 좇아도 본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도 다른 걸 쳐다보고, 등을 지고도 한곳을 바라보는 것…. 삶이다.
진경호 논설위원 jade@seoul.co.kr
한참을 걸어 더는 밑줄 그어가며 머리를 괴롭힐 일이 없어진 지금, 어쩌다 지인에게서 빌린 책에 생각지도 않던 덤이 딸려 온다. 바로 며칠 전 그가 그었을 게 분명한 밑줄이다. 번잡해진 지 오랜 머리가 아니라 스산하고, 갈수록 궁기가 커가는 가슴에 담았을 밑줄…. 하고많은 구절 가운데 그는 왜 여기에 밑줄을 긋고 선뜻 시린 마음을 내주었을까. 같은 글을 읽으며 그는 무엇을 새기고, 나는 뭘 보고 있는가.
책 속의 그를 좇다가 만난 밑줄의 그가 되어 좇던 그를 다시 좇아도 보고, 살짝 비켜서 밑줄의 그를 좇아도 본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도 다른 걸 쳐다보고, 등을 지고도 한곳을 바라보는 것…. 삶이다.
진경호 논설위원 jade@seoul.co.kr
2012-09-13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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