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날줄] 북한판 ‘트로이 목마’/구본영 논설고문

[씨줄날줄] 북한판 ‘트로이 목마’/구본영 논설고문

구본영 기자
입력 2016-09-09 22:50
수정 2016-09-09 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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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가 트로이를 무너뜨릴 때 병사들을 큰 목마 안에 숨겨 성 안으로 들여보냈다. ‘트로이 목마’란 말의 유래다. 1990년대 초 북한이 핵개발을 본격화하면서 한반도에서도 회자된 수사다.

당시 미국과 북한은 흑연로 가동 중단 등 북한의 핵 동결을 전제로 핵무기용 플루토늄 추출이 어려운 경수로를 제공하기로 합의했다. 이른바 제네바 합의다. 공사비 대부분을 한국이 부담하기로 했지만, 기대와 달리 이후 북핵 위기는 해소되지 않았다. 북측이 “한국형 경수로는 북한 체제를 무너뜨리는 트로이 목마”라며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면서다. 여기엔 경수로 공사를 매개로 한 인적·물적 왕래의 결과에 대한 북한 정권의 두려움이 깔려 있었다. 체제 개방을 촉진해 남한 주도 흡수통일로 이어질 것이란 우려였다.

이 때문일까. 경수로 공사는 지지부진했다. 그나마 2002년 10월 북한의 은밀한 핵 개발 재개 움직임이 발각되면서 5조원 규모의 프로젝트는 결국 중단됐다. 우리 기술 인력들이 모두 철수한 북한 신포에는 돔형 콘크리트 시설과 녹슨 기자재들만 망가진 목마처럼 남아 있다.

미국이 트로이 목마 카드를 다시 빼들었다는 소식이다. 어제 5차 핵실험을 강행하는 등 막 나가는 김정은 정권을 상대로 해서다. 이는 그제 오바마 행정부가 의회에 대북정보유입보고서를 제출하면서 확인됐다. 북한 주민들이 외부 세계의 ‘진실’을 접하도록 대량의 전자통신 수단을 공급하겠다는 것이다. 즉 북한 내부로 DVD, USB, MP3 등에 담은 ‘정보 폭탄’을 투입하겠다는 발상이다. 협상도, 제재도 통하지 않는 북한의 핵 도발에 지친 미국 조야가 김정은 정권을 흔드는 레짐 체인지 전략으로 선회하는 인상이다.

미국은 내년부터 5년간 연간 800만 달러(약 88억원)를 북한 정보 자유화에 투입할 예정이다. 이런 북한판 트로이 목마 작전의 실효성 여부는 USB 등 하드웨어보다 그 속의 콘텐츠에 달려 있다는 게 중론이다. 미국 쪽 전문가들은 이른바 ‘소프 오페라’(연속극)에 큰 기대를 걸고 있는 모양이다. 소프 오페라는 초창기 텔레비전 방송에서 드라마가 비누 광고와 함께 방영되면서 생긴 조어다. 톰 맬리나우스키 미 국무부 차관보는 얼마 전 한 토론회에서 “한국 드라마와 할리우드 영화는 김정은 정권이 무슨 거짓말을 하는지 알려 주는 좋은 홍보 수단”이라고 했었다.

북한 정보 자유화 노력은 단기적으론 북한 정권의 통제에 막힐 공산이 크다. 다만 굳이 김정은 정권의 폭압적 속성을 비판하지 않더라도 한류 콘텐츠가 북에 상륙한다면 장기적으론 북한 체제도 변화할 수밖에 없을 게다. 김정은 체제에서는 북의 비핵화가 불가능해 보이는 지금 우리 드라마가 북한 정권의 ‘비(非)김정은화’를 이끌지는 미지수다. 다만 북의 보통 사람들이 세습체제의 시대착오적 본색을 자연스레 깨닫게 하는 문화무기 구실은 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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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영 논설고문 kby7@seoul.co.kr
2016-09-10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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