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습의 달밤’ 되살린 조명의 힘… 전시 완성하는 빛의 세계

‘김시습의 달밤’ 되살린 조명의 힘… 전시 완성하는 빛의 세계

류재민 기자
류재민 기자
입력 2023-09-04 16:58
업데이트 2023-09-05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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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남구 호림박물관 신사분관에서 열리고 있는 ‘조선양화’ 특별전에서 김시습이 달밤에 매화를 찾으러 갔던 일화를 보름달을 형상화한 조명 등을 통해 생생하게 구현했다.
서울 강남구 호림박물관 신사분관에서 열리고 있는 ‘조선양화’ 특별전에서 김시습이 달밤에 매화를 찾으러 갔던 일화를 보름달을 형상화한 조명 등을 통해 생생하게 구현했다.
세종대왕(1397~1450)이 아끼던 천재 김시습(1435~1493)은 매화와 달을 지극히 사랑한 선비였다. 호조차 매월당(梅月堂)인 그는 매화와 달을 소재로 수많은 시를 지었고, 달이 환하게 뜬 밤에 매화를 찾아 나섰던 행복감을 ‘산 위로 달이 떠오르니/ 소박한 마음이 흡족하고 기쁘구나/ 매화 찾는 길 험난함 꺼리지 않아/ 지팡이 짚고 가시덤불 헤친다네’와 같은 시로 남기기도 했다.

시인의 마음을 달막거리게 했던 달밤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오래전 그가 사랑했을 풍경이 서울 강남구 호림박물관 신사분관에서 지난 2일 개막한 ‘조선양화朝鮮養花 꽃과 나무에 빠지다’ 전시에서 되살아났다.

제2전시실 ‘지(志) 나를 키우는 꽃’에 가면 어두운 실내 한쪽에 보름달이 떠 있는 걸 볼 수 있다. 달로 향하는 길옆으로는 다양한 꽃과 나무가 그려진 백자들이 놓여 있다. 김시습이 금오산에서 매화를 찾아가던 그 밤을 상상하며 꾸민 공간이다. 백자 아래는 경사가 진 받침대를 설치해 산을 형상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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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안의 방을 구현한 공간. OHP필름을 붙인 조명으로 난초 그림자를 즐겼던 강희안의 은은한 밤을 꾸며냈다.
강희안의 방을 구현한 공간. OHP필름을 붙인 조명으로 난초 그림자를 즐겼던 강희안의 은은한 밤을 꾸며냈다.
이곳에는 강희안(1417~1464)이 난초 그림자를 보며 풍류를 즐겼던 것을 구현한 장소도 있다. 소반 위에 백자 술병과 술잔이 있고 벽에는 난초 그림자가 비쳐 그가 ‘혼술’을 했을 밤을 상상하게 된다. 어두운 공간에 소박하게 놓은 유물과 이를 비추는 조명들이 선비의 삶을 드러낸다.

오래된 세월을 소환한 전시가 가능할 수 있던 데는 ‘조명의 힘’이 컸다. 은은하게 조명을 받는 백자 속 식물 그림들은 김시습이 달밤에 지나쳤을 꽃과 나무를, 보름달 모양의 조명은 그가 바라보고 나섰을 달밤을 전시실로 불러왔다. 강희안의 방을 완성한 난초 그림자는 오버헤드 프로젝터(OHP) 필름을 끼운 조명 덕에 구현할 수 있었다. 전시를 기획한 서지민 학예연구과장은 “김시습이 매화를 찾아 떠난 산행을 표현하려 달 모양을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보름달로 결정했다. 이번 전시는 평소보다 조명을 더 많이 썼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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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거장의 시선, 사람을 향하다’에서 찰스 윌리엄 램튼을 그린 그림이 조명을 받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거장의 시선, 사람을 향하다’에서 찰스 윌리엄 램튼을 그린 그림이 조명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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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영원한 여정 특별한 동행’에서 기마인물형 토기가 얼짱 각도로 조명을 받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영원한 여정 특별한 동행’에서 기마인물형 토기가 얼짱 각도로 조명을 받고 있다.
조명을 통해 전체 그림을 완성한 호림박물관 사례처럼 박물관 전시에서 조명 설치는 화룡점정으로 꼽힌다. 전시 기획자들은 아껴 내놓은 유물이 얼짱 각도를 찾을 수 있도록 적절한 조명발을 끊임없이 고민한다. 발광다이오드(LED) 조명 등 기술이 발전하고 박물관 전시가 진열 위주에서 경험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바뀌면서 조명의 중요성이 더 커졌다.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오는 10월 9일까지 진행하는 두 특별전 ‘영원한 여정, 특별한 동행’, ‘거장의 시선, 사람을 향하다’는 전시관 위를 올려다보면 치열하게 교차한 조명을 볼 수 있다. 유물들이 자연스럽게 얼짱 각도를 자랑할 수 있도록 고민한 흔적이다. 굳이 올려다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곳에 설치된 조명들은 관람객들이 편안히 감상할 수 있게 최선을 다해 유물을 비추고 있다. 흥미가 있는 관람객이라면 조명이 유물을 어떻게 빛내고 있는지 살피는 것도 관람의 재미 요소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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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거장의 시선 사람을 향하다’에서 천장에 달린 조명을 받은 그림들을 관람객들이 보는 모습.
국립중앙박물관 ‘거장의 시선 사람을 향하다’에서 천장에 달린 조명을 받은 그림들을 관람객들이 보는 모습.
국립중앙박물관 이현숙 디자인전문경력관은 “전시를 열기 직전까지도 적절한 조명을 고민한다. 전시마다 어떤 것은 유물에 집중하고 어떤 것은 공간을 조명하는 등 큐레이터의 의도가 들어가 조명의 중요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전시관에 들어가기 전 바로 유물을 전시한 공간이 나타나는 게 아니라 타이틀 벽이 있는 이유도 자연광을 걸러주기 위함이다. 이 경력관은 “조명이라는 게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지만 끌고 나가는 역할이라 조명 연출이 정말 중요하다”면서 “예전에는 밝기를 낮출 방법이 없어 필터를 겹겹이 싸서 조도를 강제로 조절했는데 이제는 조도 조절이 되는 조명으로 활용 여지가 많아졌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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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 방’은 천장에 원형으로 달린 조명들이 반가사유상을 향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 방’은 천장에 원형으로 달린 조명들이 반가사유상을 향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넓은 공간에 반가사유상 2점이 놓인 ‘사유의 방’처럼 적은 유물로 공간을 채울수록 조명의 힘이 더 두드러진다. 요즘 전시는 많은 유물을 꺼내는 대신 적은 유물로 여백의 미를 살리는 방향으로 가고 있어 유물과 관람객이 오롯이 관계 맺을 수 있게 하는 데 조명의 역할이 상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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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청주박물관 명품실에 전시된 ‘경주 서봉총 출토 금관’. 전시관 조명이 바닥에 금관의 그림자가 드리우게 설치됐다.
국립청주박물관 명품실에 전시된 ‘경주 서봉총 출토 금관’. 전시관 조명이 바닥에 금관의 그림자가 드리우게 설치됐다.
박물관 전시에서 조명이 특히 중요한 이유는 전시와 동시에 유물 보존까지 생각해야 하는 박물관의 숙명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서화나 책은 빛에 민감해 기준이 엄격하다.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부 이승은 학예연구사는 “무엇보다 유물 보존이 1순위”라며 “유물은 빛에 의해 조금씩 손상되는데 저희가 잘 보자고 조명을 밝히면 유물이 빠르게 손상된다. 우리도 누리고 후손들도 누릴 수 있도록 고민한다”고 강조했다.
글·사진 류재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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