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주영 그림 최석운
유숙할 객주 치기를 내키지 않아 하는 늙은 주모를 다독거려 어렵사리 봉노로 찾아들었다. 혹여 적굴 사람이거나 무전취식을 일삼는 무뢰배일지도 모른다는 의구심 때문에 봉노 내주기가 썩 반갑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깔아둔 멍석 틈새와 목침 속에 창궐하던 물것들에 뜯기다 못한 세 사람은 마당에 있는 살평상 위로 잠자리를 옮기고 모깃불을 피웠다. 천생 말뚝잠으로 밤을 지새울 수밖에 없었다. 잔뜩 흐려서 바람 한 점 없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천봉삼이 말했다.

“그들도 지레 겁먹고 도래기재로 내왕하고 있을 테지요.”
“적당들도 당장 눈치채고 도래기재로 소굴을 차린다는 생각은 못했을까…. 협기만 있다면 궐놈들과 대치하여 소탕할 수도 있을 텐데….”
“그 동무들… 입성은 말쑥하고 언변도 젊잖았으나 결기나 배짱은 없어 보입디다. 부상들 가운데 용맹도 절륜하고 기개도 놀라워 협객의 기풍이 있다는 동무들을 흔하게 볼 수야 없겠지요.”
“협객이 있다 할지라도 선달산과 옥돌봉 능선이 동서로 가로막고, 북쪽으로만 골짜기가 트여 있어서 적굴 놈들 네댓이 북쪽 골짜기에 있는 잔도만 가로막으면 생달은 독 안에 든 쥐요.”
“그러나 북쪽에 구애가 없다면 내성이나 울진에서 영월 태백으로 가는 길은 도래기재를 넘는 노정보다 하루 반 노정 줄이기는 수월하지요. 그로써 경상도 내륙과 강원도 내륙 사이의 상로를 온전하게 유지한다면 큰 이문을 바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장담한 것은 천봉삼이었다. 곽개천이 거들었다.
“서쪽으로는 충청도 영춘장까지는 고개가 많긴 하지만 120여 리, 영월 땅까지는 줄잡아 100리 상거겠으니 장정 걸음으로 이틀 노정이면 더 갈 곳이 없고, 내성까지는 옥돌봉 넘어 서벽을 지나 40리 상거에 불과하오.”
“접장께서 소굴에서 데리고 나온 노인네들과 아녀자들을 멀리 내쫓지 않고, 왜 이제까지 양류밥을 먹이고 있는지 그 속내가 이제야 어렴풋이나마 짐작이 갑니다.”
곽개천이 그 말을 받아서,
“시생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요.”
천봉삼은 덩달아 잠을 청하지 못하고 불당그래로 살평상 옆에 피워둔 모깃불을 뒤지는 주모를 살평상 모서리에 불러 앉히고 물었다.
“생달에 원래 길손들을 바라고 숫막을 연 집이 몇이었소?”
“네댓 집 되었지요. 그땐 생달이 유숙하는 길손들과 등짐장수들로 제법 붐볐더랍니다.”
“지금은 몇 가호나 살고 있소?”
“10여 호 됩니다. 천봉답에 피 농사나 짓고 근근이 연명하고 있지요.”
“사기점은 여기서 초간하오?” “오전 약수터 못미처에 있습니다만, 요즘은 등짐장수들의 출입이 뜸해지고 숫막도 덩달아 한 시절 가고 말았지요.”
달게 자기는커녕 눈을 붙이는 둥 마는 둥 등걸잠으로 조리를 친 일행은 하루종일 옥돌봉과 문수산과 박달재를 비롯하여 생달의 사기점까지 둘러보았다. 그리고 하룻밤을 더 묵고 내성으로 회정하였다. 물론 그때까지도 임소에는 반수 권재만의 소식이 당도하지 않고 있었다. 소식 늦은 것이 장차 좋은 징조인지 나쁜 징조인지 알 수 없었으나, 서둘러 십이령을 넘어 말래 접소로 회정하였다. 일행이 내성 발행하여 가풀막진 모래재 초입으로 들어설 즈음, 배고령에게서 배웠다는 길세만의 타령이 들려왔다.
미역 소금 어물 짐 지고 내성장을 언제 가노
가노 가노 언제 가노 열두 고개 언제 가노
시그라기 우는 고개 이 고개를 언제 가노
대마 담배 콩을 지고 흥부장을 언제 가노
가노 가노 언제 가노 열두 고개 언제 가노
시그라기 우는 고개 이 고개를 언제 가노
반평생을 넘던 고개 이 고개를 넘는구나
가노 가노 언제 가노 열두 고개 언제 가노
시그라기 우는 고개 이 고개를 언제 가노
서울 가는 선비들도 이 고개를 쉬어 넘고
가노 가노 언제 가노 열두 고개 언제 가노
시그라기 우는 고개 이 고개를 언제 가노
오고가는 원님들도 이 고개를 자고 넘네
가노 가노 언제 가노 열두 고개 언제 가노
시그라기 우는 고개 이 고개를 언제 가노
꼬불꼬불 열두 고개 조물주도 야속하다
가노 가노 언제 가노 열두 고개 언제 가노
시그라기 우는 고개 이 고개를 언제 가노…
2013-08-16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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