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소원이 이뤄지면 행복할까?” 어른들을 위한 한 편의 동화…창극 ‘나무, 물고기, 달’

[리뷰] “소원이 이뤄지면 행복할까?” 어른들을 위한 한 편의 동화…창극 ‘나무, 물고기, 달’

허백윤 기자
허백윤 기자
입력 2021-03-19 13:43
수정 2021-03-19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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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까지 국립극장 하늘극장서 공연
소원 이뤄주는 ‘소원나무’ 찾는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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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극 ‘나무, 물고기, 달’ 공연 장면. 국립창극단 제공
창극 ‘나무, 물고기, 달’ 공연 장면.
국립창극단 제공
둥근 무대 위에서 한 편의 동화가 펼쳐진다. 물고기, 소녀, 소년, 순례자, 나무들이 책 페이지를 한 장씩 넘기듯 흰 바탕 옷에 각자의 색깔을 입혀 이야기에 노래를 덧댄다. ‘생각하는 대로 이뤄지면 우리는 행복할까?’ 귀엽고 재미있는 상상을 따라가다 보면 곧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나쁜 생각마저 그대로 일어나는 상상은 해 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지난 11일부터 국립극장 하늘극장에서 공연 중인 창극 ‘나무, 물고기, 달’은 이렇게 참신한 고민을 관객들과 나눈다.

창극 ‘나무, 물고기, 달’ 속 이야기는 수미산 꼭대기 거대한 나무를 두고 그려진다. 생각하는 모든 것을 들어준다는 소원나무를 찾아 소원을 이루고 싶어 다양한 사연을 가진 이들이 함께 길을 떠나는 여정이다. 제주 구정신화 ‘원천강본풀이’와 인도 신화 ‘칼파 타루’ 등 동양 설화들이 바탕이 됐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소리꾼, 달지기 3명과 함께 소원을 이루고 싶은 존재들이 하나씩 소원나무를 찾는 여정에 동참하면서 극이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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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극 ‘나무, 물고기, 달’ 중 물고기(김수인 분)와 소녀(조유아 분). 국립창극단 제공
창극 ‘나무, 물고기, 달’ 중 물고기(김수인 분)와 소녀(조유아 분).
국립창극단 제공
검은색을 배경으로 한 단출한 원형 무대를 빛내는 건 소리꾼들이다. 깨끗하고 단정한 흰색 옷을 입은 모두는 이야기꾼이자 앙상블이었다가 각자의 이야기를 할 때는 형형색색 옷을 흰 바탕 위에 얹어 입는 것이 독특하다. 무엇보다 올해 국립창극단에 처음 들어온 신입단원들을 비롯해 창극단의 젊고 매력있는 단원들이 각자에 딱 맞는 옷을 입고 저마다 특징이 뚜렷한 맵시를 다채롭게 선보인다.

이야기꾼 역할을 하는 달지기, 서정금, 이소연, 유태평양이 깊고 탄탄한 소리로 중심을 잡아주면 동화 속에서 나온 듯한 캐릭터를 연기하는 소리꾼 배우들이 개성과 끼를 담아 마음껏 소리를 뽐낸다. 배고픔에서 벗어나고 싶은 소녀(조유아)와 자신이 키우는 소 108마리가 아닌 형제와 가족을 찾고 싶어하는 소년(민은경), 천년의 고행을 끝맺고 깨달음을 얻고 싶은 수례자(최호성), 도끼로 베어진 가지만 남았지만 다시 한 번만 꽃 피울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슴나무(왕윤정·김우정), 이들을 수미산 소원나무로 끌고 가는 영험한 물고기(김수인) 등 각자 걸친 옷 색깔처럼 하나 하나 또렷한 빛을 발한다.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가난한 우리네 살림살이. 아무리 간절히 기도를 해도 무정한 하늘은 대답도 없네.”(소녀)

“진짜 가족 진짜 행복 진짜 가짜 진짜 행복, 그게 뭘까 진짜 행복 진짜 인연 진짜 가족”(소년)

“몰라 몰라 암것도 몰라. 뭘 모르는지도 몰라 몰라. 아무것도 모르겠네. 아직도 아무것도 모르겠어. 이 세상은 텅 비어있고 괴로움도 없고 지혜도 없고 얻을 것도 없다니 이상도 하지.”(순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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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극 ‘나무, 물고기, 달’ 속 소년(민은경 분)이 노래하는 모습. 국립창극단 제공
창극 ‘나무, 물고기, 달’ 속 소년(민은경 분)이 노래하는 모습.
국립창극단 제공
재치있으면서도 의미를 찾고싶어지는 노랫말에 입혀진 선율은 편안하고 발랄하게, 스며들 듯 마음에 콕콕 박힌다. 판소리 본연의 맛과 소리꾼들의 목소리, 캐릭터 특성들이 절묘하게 잘 짜여 그야말로 동화 속 장면들처럼 훌훌 읽어낼 수 있다. 객석에서도 “잘한다, 좋다!” 추임새가 절로 터져 나올 만큼 관객들과 호흡도 잘 맞는다.

끊임 없이 ‘지금’을 고민하며 관객들과 꾸준하고 활발하게 소통해 온 창작진들이 꾸민 무대임을 제대로 보여준다. ‘휴먼 푸가’, ‘노래하듯이 햄릿’, ‘하륵이야기’ 등 몸짓과 연기 본연에 집중하면서도 참신하게 무대를 꾸민 연극으로 관객들과 소통해 온 배요섭 연출가가 극본과 연출을, ‘사철가’, ‘노인과 바다’ 등 판소리로 더욱 넓은 세계를 그려온 소리꾼 이자람이 작곡과 작창, 음악감독을 맡았다. 배우들의 몸짓은 국가무형문화재 제7호 고성오광대 이수자인 허창열이 전통 탈춤 리듬을 기반으로 구성했다.

마스크에 가려진 입꼬리를 잔뜩 올리고 작품을 보다보면 어느새 마스크 위 두 눈에 힘이 들어가고 미간이 좁혀지기도 한다. 힘겹게 소원나무에 다다른 이들이 막상 수미산 봉우리에서 소원나무와 만났을 때 겪는 일이 어쩐지 남 일 같지가 않아서다. 마음먹은 모든 것을 이뤄지면 마냥 행복하고 모든 것이 풀릴 것 같았지만 소원나무는 머릿속 나쁜 생각까지 실제로 이뤄준다. 소원에는 희망 뿐 아니라 욕망, 불안, 공포, 결핍이 공존한다. 결국 모든 것은 내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정확히 짚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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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극 ‘나무, 물고기, 달’. 국립창극단 제공
창극 ‘나무, 물고기, 달’.
국립창극단 제공
“마음을 들여다본다, 가만히 들여다본다. 한 번에 한 가지 생각 가물가물 흔들리다가 슬금슬금 움직이는가. 좋을 것도 없고 나쁠 것도 없다. 좋고 나쁜 건 다 네 마음에서 생겨난 거라. 그저 바라보라, 너는 어디서 왔나. 안개가 걷히면 청산인 것을 보면 사라진다. 넌 아무것도 아니야.”

달지기들의 노래는 곧 객석을 채운 수많은 마음에 와 닿는다. 잠시나마 ‘나’를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어른들을 위한 이 세련되고 감각적인 동화는 이내 그 마음들을 어루만진다. “행복도 잠깐, 불행도 잠깐, 지나가면 그뿐이라.”

허백윤 기자 baikyoo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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