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철환 씨] 이젠 형이라고 부를 게요

[친절한 철환 씨] 이젠 형이라고 부를 게요

입력 2011-03-20 00:00
업데이트 2011-03-20 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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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전에 내뱉은 말이나 행동조차 깜빡거리기 일쑤라면 참 사는 게 고단하겠죠. 세수를 한 후 양치질을 했는지 안 했는지 가끔 헷갈려서 칫솔에 물기가 남아 있나 확인한다는 학계 원로분의 고백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나이 앞에 장사 없다고들 하는데 반대로 오래전 어느 날 오후의 일은 영화의 하이라이트처럼 생생히 남아 불현듯 기억의 창고를 시네마천국으로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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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이니까 제가 중학교 2학년 때로군요. 같은 반 친구 광호네 집에 놀러 갔는데 그 아이 살던 곳이 당시로선 흔하지 않던 아파트였습니다. 서울 돈암동 시장 반경 1킬로미터를 벗어난 적 없는 저로서는 생전 처음 보는 주거 형태였죠. 낯선 것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리저리 둘러보는 제 시선은 서울에 갓 올라온 시골 쥐 비슷했을 겁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기타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부드러운 목소리에 실린 노래는 신중현 작사 · 작곡의 ‘봄비’였습니다. “이슬비 나리는 길을 걸으면 봄비에 젖어서 길을 걸으면”으로 시작하는 노래죠.

광호가 자랑을 시작했습니다. “우리 형 대학 친군데 엄청나게 노래 잘하는 사람이야.” 제가 듣기에도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바로 그 노래하던 형이 진짜 가수가 되었다는 소식을 광호로부터 전해 들었습니다. 시애틀에서 사업을 하는 광호가 몇 해 전 귀국했을 때도 당연히 이 이야기는 안주거리로 빠지지 않았죠.

궁금하신가요? ‘절대동안’이라는 애칭으로 지금도 <열린 음악회>나 <콘서트 7080>에 자주 나오는 이분의 이름은 김세환입니다. ‘토요일 밤에’ ‘좋은 걸 어떡해’ ‘길가에 앉아서’ 등 히트곡이 셀 수 없이 많죠. 대학교 때 명동 거리를 걷는데 로보(Lobo)라는 가수가 부른 ‘스토니(Stony)’가 감미롭게 흘러나왔습니다. 저절로 노래의 주인을 찾아 걸어 들어갔죠. ‘무뚝뚝한 사나이’라고 번안해서 부르는 형의 모습이 얼마나 멋지던지. 지금 비(정지훈)의 인기에 절대 뒤지지 않던 시절이라는 걸 당시의 젊은이들은 증언해줄 겁니다.

방송사 PD 생활을 꽤 오래 했는데 단 한 번도 세환이 형과 대화를 나눈 일이 없습니다. 실은 인사조차 건넨 적이 없죠. 제가 마음속으로 세환이 형이라고 부른다는 사실도 그분은 모를 겁니다. 얼마 전엔 ‘세시봉 친구들’이라는 부제로 조영남, 송창식, 윤형주 형들과 함께 <놀러와>라는 토크쇼에 나와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했죠. 시청률도 그 프로그램 생긴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는군요. 그때 세환이 형이 툭 던진 말은 인터넷에서도 화제였죠. “나도 환갑이 넘었는데 완전히 애들 취급하고 그래.” 머쓱해진 영남이 형의 표정도 일품이었습니다. 정해진 대본도 없이 육순의 청년들은 TV에서 그렇게 ‘놀고’ 있었습니다.

중년 시청자들의 반응은 따뜻했거나 뜨거웠거나 두 가지 중 하나였습니다. 나이를 까마득히 잊은 그들의 농담은 여타 오락프로에서 쏟아져 나오는 일회성 신변잡기가 아니었으니까요. 그 어떤 드라마에서보다 감동적인 장면이 자연스럽게 연출되었습니다. 하모니의 아름다움, 동심의 소중함, 무엇보다 우정의 가치가 자연스럽게 드러난 시간이었습니다.

이제 늦은 나이에 세환이 형을 만나서 형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솔직히 전 자신 있습니다. 얼마 전 국방부에서 군인들 대상으로 강의를 한 적이 있는데 행사가 끝난 후 몇몇 병사가 명함을 달라고 했습니다. 얼마 후 그들 중 두 사람이 찾아와서 밥도 먹고 술도 한잔 마셨지요. 한 명은 해병대를 갓 제대한 한규빈, 또 한 명은 의장대에서 근무하는 김성원 상병이었습니다.

흥이 좀 올랐을 때 그 친구들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뭐라고 부르는 게 좋을까요?” 전 망설임 없이 “형이라고 불러” 했죠. 그랬더니 일고의 주저함도 없이 형이라고 즉각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술 깨면 달라질까 했는데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때부터 제겐 대략 35년 차이 나는 동생 두 명이 한꺼번에 생긴 거죠. 그들도 용감하지만 저도 관대(?)하지 않습니까?

인생은 울고 왔다가 울리고 가는 거라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이에 많이 웃는 게 좋겠죠. 세환이 형이 동안인 건 타고난 유전자도 원인이겠지만 늘 웃는 그 부드러운 미소 덕분 아닐까요? 형을 만나면 이렇게 털어놓을 생각입니다. 40년 이상 형을 지켜보았노라고. 이젠 당당히 형이라고 부르고 싶다고. 형도 놀라지 않으실 겁니다. 그 자리에 규빈이와 성원이도 데리고 가는 건 어떨까요? 즐거운 4형제의 만남이 벌써부터 기다려집니다.

주철환 _ ‘젊음’을 사랑하고 ‘만년 젊은이’로 살고자 노력하는 필자는 교사에서 PD로, 다시 교수에서 방송사 사장으로 변신을 거듭하였고, 싱어송라이터와 작가로도 활동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 도전하며 변화를 즐겨왔습니다. 최근엔 중앙미디어네트워크의 방송제작 본부장으로 새로운 청춘 시나리오를 쓰고 있습니다. ‘친절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는 그는, 친절하고 부지런한 사람에게 행운도 찾아온다고 믿습니다.

글 주철환|그림 최석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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