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언제나 네 편이란다

우리는 언제나 네 편이란다

입력 2011-07-17 00:00
업데이트 2011-07-17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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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일 엄마아빠 되어주기

멀리 대청호가 내려다보이는 충북 진천의 어느 주말농장, 토마토, 옥수수, 고구마 심기가 한창이다. “여기 물 없어, 빨리 와.” “이렇게 흙을 살짝 덮어줘야지.” 여기까지는 평범한 가족의 주말 나들이 풍경과 다름없어 보인다. 어라, 그런데 자세히 보니 아이들 수가 좀 많다. 그뿐 아니다. 초등학생 학부모라고 하기에는 너무 젊은 엄마, 아빠도 눈에 띈다. 이날은 청주KYC ‘일일 엄마아빠 되어주기’ 회원들이 한 달에 한 번 늘푸른아동원 열세 명 아이들의 엄마, 아빠가 되어주는 날이다. 만날 때마다 그날의 짝꿍을 정해 함께 하루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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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KYC 대표를 맡고 있는 엄승용 씨(34세)는 자원봉사자로 활동하던 20대 초반에 영아원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이 아이들을 처음 만났다. “지금은 법이 바뀌었지만 당시에는 36개월이 넘으면 고아원으로 옮겨야 했어요.” 그 아이들이 자라는 과정을 계속해서 지켜봐 주고 싶다는 마음이 모여 이 모임이 생겨났다. 결혼이나 전근 등 개인사정으로 인한 인원 변동은 있었지만, 일일 엄마아빠와의 나들이는 10년이 넘게 계속되고 있다. 그사이 아이들은 초등학교 4~6학년이 되었다.

처음에는 여건 상 외부 나들이가 쉽지 않은 아이들을 밖으로 데리고 나와 함께 놀아주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하지만 아이들이 커갈수록 일일 엄마아빠의 고민도 커져갔다. 매달 새로우면서도 아이들이 좋아하고, 교육적으로 도움이 되는 체험활동들을 기획해내기란 쉽지 않다. 각종 체험활동을 비롯해, 가정에서 생활하면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는 것들 - 요리하기, 장보기, 버스 타기 등을 함께 해보기도 한다. 좋은 부모가 되려면 공부도 필요한 법. 일일 엄마아빠도 1년에 두 번 교육을 받는다. 최근에는 10대 아이들과의 소통법과 성교육법에 대해 배웠다.

아이들이 공을 차고 노는 사이 그늘에서 잠깐 쉬면서도 일일 엄마아빠들은 아이들 이야기가 한창이다. “한 달 새 민호(가명, 6학년)가 많이 컸네.” “이번 시험에서 미정이(가명, 6학년)가 87점 맞아서 1등 했대.” “오늘 수현이(가명, 4학년)가 왜 이렇게 불안해? 아빠가 만나러 간다고 자랑하더니 아빠가 안 왔나?” 지금이야 몇 등 했다고 자랑도 하고 제 발로 와서 안기지만, 처음부터 아이들과 그랬던 것은 아니다. “처음 오고 1년은 투명인간이 된 것 같았어요. 아이들이 나라는 존재를 아는가 싶을 정도로.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다 기억하고 있더라고요.”(이혜영, 36세) 아이들이 마음을 줘도 될 사람인지 결정하는 데 1년이란 시간이 걸린 것이다.

2004년부터 일일엄마로 활동해온 최정희 씨(45세)는 보육원의 초대를 받아 간 연말 행사에서 아이들이 자신을 ‘후원자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다. “우리들이랑 있을 때 한 번도 그렇게 부른 적이 없었거든요.” 잠깐 왔다 가는 사람들에게 익숙한 아이들은 작별에도 능숙하다. “같이 잘 놀다가 헤어질 때가 되면 뒤도 안 돌아보고 보육원으로 쏙 들어가 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일일 엄마아빠들은 헤어지기 전에 한 사람씩 돌아가며 아이들과 ‘윤회 악수’를 한다.

요즘 일일 엄마아빠 사이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사춘기’다. 신연지 씨(28세)는 얼마 전 민호(가명)에게 큰 상처를 받았다. “민호랑 5년 넘게 짝을 했었거든요. 근데 이제 누나랑 짝하기 싫다고, 저 형이랑 짝할 거라고 하니까 너무 서운한 거예요.” 이성에 눈뜬 아이들이 드디어 내외(?)를 시작한 거다. 다가오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어떻게 넘겨야 할지, 걱정이 크다. 청소년 심리 상담사로 일하는 천미영 씨(28세)는 그래서 더 아이들에게 마음을 쏟는다. “사춘기가 돼서 마음을 열려고 하면 더 힘들거든요. 지금부터 가까워지면 그때 더 쉽게 마음을 열 수 있겠죠.”

한 달에 한 번 만나는 것 외에도 일일 엄마아빠들은 평소 아이들과 전화 통화를 하기도 하고, 보육원을 찾아가 따로 만나기도 한다. 일일 엄마아빠 중 최고령자인 전경숙 씨(59세)는 정수(가명, 5학년)가 초등학교 1, 2학년 때 학교를 찾아가 담임선생님을 만나기도 했다. “하도 천방지축이라서 걱정이 돼서 가봤죠.”

두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이정순 씨(47세)는 아이들을 만나며 가장 마음 아팠던 순간이 “괜찮아. 나한테는 (상관할 사람) 아무도 없는데 뭐”라는 말을 들었을 때다. “이 아이들 사이에도 구분이 있어요. 밖에 가족이 있어서 가끔이라도 찾아오는 아이들은 훨씬 더 밝고 잘 자라요. 그런데 그렇지 않은 아이들은 키도 작고 영양상태도 나빠요.” 그의 바람은 아이들이 비뚤어지고 싶은 순간에 ‘나는 아무도 없으니까’가 아니라 ‘나는 OO가 있으니까’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가족이 있어 좋은 점은 ‘내 편’이 있다는 것 아닐까? 때론 버겁기도 하고 짐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한결같이 나를 지켜봐주고 지지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삶의 끈을 놓아버리지 않을 이유가 된다. ‘일일 엄마아빠 되어주기’ 회원들의 목표는 이 아이들의 평생 멘토가 되는 것이다. 지금은 보육원의 보호 아래 있지만, 아이들은 만 18세가 되면 약간의 정착금을 받고 세상으로 나가게 될 것이다. 이 아이들이 세상의 모진 비바람과 싸울 때, 때론 상처투성이로 무너져 내릴 때 저 멀리서 등불을 밝히고 기다리고 있을 이들을 가족이란 이름이 아니면 무엇으로 부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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