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수권·안내양… ‘서민의 발’ 애환 품고 달려 왔다

회수권·안내양… ‘서민의 발’ 애환 품고 달려 왔다

입력 2011-08-22 00:00
수정 2011-08-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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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서 첫선… 시내버스 도입 100년 변천사

“예전에 10장 한 세트의 회수권을 작게 잘라 11장으로 사용했던 추억이 떠올라요. 직접 회수권을 정교하게 그리는 간 큰 녀석들도 있었죠. 회수권은 학생들의 재산목록 1호였습니다.” (이필식씨·44·서울 서대문구 홍은2동) 통근·통학 회수권을 처음 사용한 1957년도 버스값도 아까워하던 시절의 우리네 풍속도다. 21일 서울시에 따르면 대중교통 수단으로 버스가 도입된 지 올해로 어느새 100년째를 맞았다. 한 세기 동안 서민들의 애환을 싣고 달려온 시내버스의 변천사와 함께 당시의 소비자물가와 시대상을 반추해 볼 수 있다. 과거속 추억의 시간 여행을 떠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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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 8인승 승합자동차는 일제강점기인 1912년 대구에서 처음 영업을 시작했다. 한 일본인이 승합자동차에 여러 사람을 태우고 다니며 돈을 받은 것이 시초였다. 사업자와 노선이 빠르게 늘면서 경기, 서울 등지에도 상업용 버스가 등장했다.



경성(서울)에 버스 도입이 늦어진 이유는 1927년 당시 서울 인구가 31만여명으로 전차, 자전거, 인력거, 마차만으로도 이동이 원만했기 때문이다. 1927년 6월 서울 최초로 시내버스 운행 신청서가 총독부에 제출됐고 이듬해 1928년 경성부에 시내버스 사업권을 내주면서 우리나라에 본격적인 시내버스 운행 시대가 열렸다.

1928년 첫 운행 당시의 버스 요금은 7전. 반면 전차는 동대문과 서대문, 남대문을 경계로 구역당 5전씩을 받았다. 새로 등장한 버스가 요금 경쟁에서 기존 전차에 밀리자 지금의 전철·버스 간 환승개념이 도입된다.

전차가 다니지 않는 곳에 버스를 배치, 전차와 운행 구간을 분리한 것이다. 적자를 메우려는 나름대로의 고육책이었던 셈이다. 결국 1930년대 요금은 5전으로 내렸다. 5전이면 당시 자장면 한 그릇을 사 먹을 수 있었다.

반면 1920년대 택시 요금은 거리와 관계없이 균일제로 시내요금이 1원이었다. 택시 요금은 1937년 기본 50전, 1949년 200원, 1950년 200원, 1966년 60원, 1970년 90원, 1988년 800원, 1998년 1300원이었다.

1965년 시내버스 요금은 8원. 1970년대는 15~80원, 1980년대 120~200원을 거쳐 현재 900원까지 이어졌다. 반면 1974년 처음 운행된 지하철의 첫 요금은 1구간이 30원에서 시작해 1981년 100원, 86년 200원, 93년 300원을 거쳐 1999년 500원으로 뛰었다.

●1930년대 요금 5전 ‘자장면 한 그릇값’

버스 요금은 1930년대 같은 가치로 출발한 자장면값이 요동친 것에 비하면 오름폭이 적은 편에 속한다. 물론 왕복 요금을 감안하면 두 배 정도 격차를 보인다. 1960년대 자장면값은 15원, 1970년대 30원, 1980년 초 1000원 고지를 넘더니 1990년 초 2000원, 90년대 말 3000원, 2000년대 4000원대로 뛰었다.

만원 버스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오~라이”라고 외치던 여성 차장. 버스 안내양은 진한 남색 등의 제복과 모자를 착용했으며 엄격한 필기시험과 구술면접을 거쳐 선발됐다. 당시 표를 끊어 주던 안내양의 인기가 엄청나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얻었으며 실제 배우로 발탁되기도 했다.

김경숙(55·북부운수 버스기사)씨는 “면접을 볼 땐 주로 또렷또렷하고 행동이 민첩한 젊은 여성을 뽑은 것 같다. 안전이 최우선이니까 승객들을 책임져야 한다는 사명감이 없으면 견디기 힘든 게 버스 안내양”이라며 웃었다. 앞서 1949년부터 버스 앞쪽에 승차해 기사를 돕는 조수(남성)가 등장했으나 여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건비가 비싸고 승객과 허구한 날 살랑이를 벌여 1960년대에 사라졌다.

●남자 조수는 비싸고 실랑이 많아 퇴출

1970년대는 그야말로 버스의 전성 시대. 승객들과 부대끼느라 학생들의 가방끈이 끊어질 정도였다. 차량이 너무 부족해 당시 지각하는 회사원이 하루에 20만명을 웃돌았다고 한다. ‘콩나물 버스’라는 별명도 이때 생겨났다.

경기 북부지역에서 7년간 안내양을 했다는 김경순(55)씨는 “1970년대만 해도 장날이면 버스 안에 120명이 탈 때도 있었어요. 문도 못 닫고 문에 대롱대롱 매달려 갈 때도 많았죠. 당시 요금이 15원이었는데 돈을 받으면 메모지 같은 종이에 적어 주기도 했죠. 승객이 어디서 내린다는 암호 같은 걸 적어 기억했던 게 생각나요.”라고 당시를 떠올리며 웃었다.

급격한 산업화와 경제성장으로 젊은 여성들이 공장으로 몰리면서 버스 안내양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였다. 결국 1980년대부터 안내양 없이 승객이 앞문 승차, 뒷문 하차하고 요금을 선불로 내는 시민자율버스 운행이 시작되고 1989년 자동차운수사업법 개정을 통해 버스 안내양 고용 의무조항이 삭제됐다. 애환을 함께 나누던 버스 안내양이 역사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이병한 서울시 교통정책과장은 “버스 이용객이 여전히 지하철을 앞지른다.”면서 “지난해 마을버스를 포함한 시내버스 일일 이용객 수가 지하철의 483만명보다 약 100만명 더 많은 572만명에 이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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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삼기자 kangtong@seoul.co.kr
2011-08-22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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