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건군주제 뛰어넘은 3·1운동… 상하이 임시정부 씨앗되다

봉건군주제 뛰어넘은 3·1운동… 상하이 임시정부 씨앗되다

김기중 기자
김기중 기자
입력 2019-02-24 21:16
수정 2019-02-25 0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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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공화국 100년] <1부> 3·1운동 100년 (1)민주공화정의 열망이 피어 오르다

급작스런 고종 서거… 3·1운동에 도화선
복벽주의 아닌 왕정 극복한 민족자결주의
19세기말 독립협회 등 민주공화정 꿈꿔
수많은 임정 탄생… 세 키우기 위해 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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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1월 1일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대한민국 임시정부 신년축하회 기념촬영 사진. 두 번째 줄 왼쪽부터 김구, 양헌, 도인권, 김여제, 이유필, 김병조, 손정도, 신규식, 이동녕, 이동휘, 이시영, 안창호, 김철, 김립, 장건상, 윤현진, 신익희, 이규홍, 이춘숙, 정인과. 독립기념관 제공
1920년 1월 1일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대한민국 임시정부 신년축하회 기념촬영 사진. 두 번째 줄 왼쪽부터 김구, 양헌, 도인권, 김여제, 이유필, 김병조, 손정도, 신규식, 이동녕, 이동휘, 이시영, 안창호, 김철, 김립, 장건상, 윤현진, 신익희, 이규홍, 이춘숙, 정인과. 독립기념관 제공
우리나라 헌법 전문에는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고 돼 있다. 정부는 중국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 수립일인 4월 11일을 공휴일로 지정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1919년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한 임정의 의미를 기리자는 취지다. 19세기 말부터 우리 민족은 민주공화정에 대한 열망을 서서히 키워 나갔다. 고종의 죽음을 계기로 3·1운동으로 이를 분출했고 상하이에 임정을 세워 계승했다.

●3·1만세운동 도화선이 된 고종의 죽음

“사실 조선 멸망의 최대 원인은 궁정 자체에 있었다.”

1910년 중국의 대표적 개혁가 량치차오(1873~1929)는 사라진 대한제국을 두고 이렇게 개탄했다. 그는 “오늘날(20세기 초) 입헌국에서 군주는 정치적 책임이 없고 약정도 할 수 없다. 하지만 전제국가는 이와 다르다. 국가의 운명이 전부 궁정 한 곳에 달려 있다”고 설명했다. 조선이 전제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 탈바꿈하지 못해 망국에 이르렀다는 지적이다.

1910년 8월 29일 일본은 강제로 병탄조약을 맺고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삼았다. 육군 대장이 조선 총독으로 부임해 행정과 입법, 사법권을 모두 장악했다. 우리 역사의 최대 암흑기였던 36년간의 일제 통치기간이 시작됐다.

1919년 1월 21일 고종(1852~1919)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한반도 전체가 충격과 비통에 휩싸였다. 건강 하나만큼은 ‘완전체’에 가깝던 그가 돌연사하자 ‘고종이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성난 민초들이 고종의 서거를 애도하고자 서울로 향했다. 이런 움직임이 3·1운동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됐다. 하지만 이들이 ‘복벽주의’(나라를 되찾아 왕을 다시 세우겠다는 주장)를 내세운 것은 아니다. 되레 일본으로부터 독립할 새 나라는 대한제국(조선)을 계승하되 국가의 주인은 왕이 아니라 인민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24일 “3·1운동 당시 고종에 관한 구호가 아예 없었다”면서 “1911년 중국 신해혁명, 1917년 러시아혁명, 1918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공통점은 황제로 상징되는 절대 권력을 부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 민족은 고종의 죽음을 계기로 왕정을 완전히 극복했다. 3·1운동은 과거 봉건군주제를 넘어선 것이기에 가히 ‘혁명’이라고 부를 만하다”고 강조했다.

●1896년 독립협회 때부터 민주공화제 열망

우리 민족은 대한제국 멸망 이전인 19세기 말부터 민주공화정에 대한 열망을 키워 나갔다. 1896년 조선에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독립협회가 만들어진 것이 대표적이다. 자주독립과 천부인권 존중, 한글 사용 등을 강조했는데, 배후에는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1858~1902)를 포함해 서양 선교사들이 있었다. 아펜젤러는 배재학당을 만들어 조선인에게 영어와 민주주의를 가르쳤다. 이승만(1875~1965)도 이 학당의 학생이었다.

독립협회는 종종 대중집회인 만민공동회를 열었다. 만민공동회는 관민공동회로 이어지며 국정개혁의 대원칙을 결정하기도 했다. 미국의 한인들이 발간한 신한민보 1910년 7월 6일자 사설에는 독립협회 정신을 계승해 “현 정부(대한제국)가 일본에 투항한 지 오래됐는데, 우리는 인민의 정신을 대표해 우리의 복리를 도모할 만한 정부를 세울 것임을 선언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런 움직임은 일본 병합 뒤 국내외 망명정부 수립으로 이어졌다. 1911년 12월 연해주 한인들은 항일 결사체인 권업회를 세웠다. 이들은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대한광복군 정부를 수립했다. 1917년 12월에는 ‘전로한족중앙총회’를 세워 독자적인 활동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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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3월 중국 동포들은 상하이에서 신한혁명당을 결성했다. 1917년 7월 박은식과 신채호, 김규식 등 독립운동가 14명이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했다. 이들은 독립운동 최고기관으로 공화정제로 운영되는 임시정부를 건설하자고 주장했다. 국내에서도 3·1운동을 준비한 천도교를 중심으로 임시정부수립운동을 펼쳤다.

3·1운동을 계기로 수많은 임시정부가 생겨났다. 이 가운데 러시아 대한국민의회(노령정부)와 중국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서울의 한성임시정부는 힘을 모으고자 하나로 통합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아는 임정의 시작이다. 김정인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추진회’ 기획소통분과위원회 위원장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명시한 임정의 임시헌장은 정당성의 기원을 3·1운동에서 찾고 있다”고 밝혔다.

1920년 1월 임정 신년축하회 연설에서 내무총장 안창호는 민주공화국 탄생의 감격을 이렇게 전했다.

윤수혁 서울시의원, 신당동 금호중학교 앞 횡단보도 신설…27일 오후 본격 개통

서울특별시의회 윤수혁 의원(국민의힘·중구2)은 중구 신당동 금호중학교 앞 교차로의 횡단보도 신설 공사가 마무리돼, 27일 오후부터 주민들이 이용할 수 있게 됐다고 밝혔다. 이번 횡단보도 개통으로 학생들의 통학 안전과 지역주민들의 보행 편의가 개선될 것으로 기대된다. 해당 교차로는 금호중학교와 인접해 있어 2025년부터 학생과 주민의 보행 안전을 위한 시설 개선 요구가 지속적으로 제기돼 왔다. 서울시는 이러한 요구에 대응해 관계 기관과 꾸준히 협의하며 횡단보도 설치를 위한 노력을 이어왔다. 이번 사업은 서울시 예산을 투입해 중구 신당동 40-678 일대에 신규 횡단보도를 설치하고 기존 횡단보도는 정비하는 한편, 보행 신호기와 CCTV까지 확충하는 내용으로 진행됐다. 이에 따라 학생들이 학교 정문 앞에서 안전하게 신호에 맞춰 길을 건널 수 있게 되었으며, 인근 주민들의 전반적인 보행 여건도 한층 개선되었다. 이 과정에서 윤수혁 의원은 주민들의 목소리를 서울시에 적극 전달하고 관련 부서와 긴밀히 소통하며 힘을 보탰다. 특히 현장을 직접 찾아 대기 중인 보행자의 안전을 위협할 만한 요소를 꼼꼼히 살피고 관계 기관에 보완 대책을 요구하는 등, 실사용 과정의 잠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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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나라에는 황제가 없나요? 있습니다. 과거에는 황제가 단 한 사람밖에 없었지만 이제는 2000만 국민이 모두 황제요. 제군 모두가 황제란 말입니다. 황제란 무엇이오? 주권자의 이름입니다. 지금은 제군이 모두 다 주권자외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2019-02-25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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