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26년간 고문후유증 시달려

김근태, 26년간 고문후유증 시달려

입력 2011-12-30 00:00
업데이트 2011-12-30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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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9월4일 새벽, 38세의 청년 김근태는 서울 서부경찰서 유치장을 나섰다. 그가 의장이던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총회를 개최했다는 이유로 선고된 구류 10일을 채우는 날이었다.

그러나 복도로 나서는 순간 7명의 정사복 경찰이 그를 가로막더니 30여분 차로 달려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고 갔다.

26년 전 공안당국이 30일 별세한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에게 가한 무자비한 고문의 시작이었다.

김 고문은 515호실에서 폭력혁명주의자, 공산주의자임을 자백하라는 강요를 받았다. 온몸은 발가벗겨진 채 혁대로 꽁꽁 묶여 고문용 칠성판 위에 내팽개쳐졌다.

그는 사흘간 잠을 잘 수 없었고 밥도 제공받지 못했다. 자백을 거부하자 고문은 더욱 포악해졌다. 20여일간 8차례 전기고문과 2차례 물고문을 당했다.

그는 “차라리 죽여달라”고 절규했지만 고문자들은 “그건 말하지 않겠다는 것과 다름없다”며 고문의 강도를 높였다.

결국 김 고문은 “삼천포에서 배를 타고 월북했으며 간첩으로 남파된 형들과 자주 만났다”며 공안당국이 불러주는 소설 같은 혐의를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생전에 “전기고문을 당하면서 죽음의 그림자가 코앞에 다가왔다”, “무릎을 꿇고 사느니보다 서서 죽기를 원한다는 노래를 속으로 불렀다”고 당시 고통스러운 심정을 회고했다.

김 고문은 재판에서 유죄가 인정돼 1988년까지 투옥됐다.

그러나 김 고문은 고문사실을 폭로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전에도 고문을 당했다는 주장이 나왔지만 모호하다는 이유로 묵살되기 일쑤였다.

그래서 그는 고문내용과 일시, 고문한 사람의 실명과 대공분실에서 통하는 별명, 생김새 등 정황을 머릿속에 하나하나 새겨넣었다. 고문이 잠시 멈추는 틈틈이 고문자의 손목시계를 보고 시간을 기억했고, 진술조서 끝에 쓰인 수사관 이름과 서명도 놓치지 않았다.

이를 토대로 김 고문의 변호인들은 1985년 12월 ‘고문기술자’ 이근안으로 밝혀진 ‘김 전무’를 비롯해 고문 가담자 8명을 고발했다.

이씨는 1988년 12월24일 고문혐의로 검찰이 수사에 착수하자 도피생활에 들어갔다가 1999년 10월 자수해 2000년 9월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다.

김 고문은 2005년 수감중인 이씨를 면회해 용서의 뜻을 밝혔지만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을 끝내 회복하진 못했다.

그는 고문 후유증으로 매년 초가을만 되면 한 달가량 몸살을 앓았다. 한기와 콧물 때문에 한여름에도 에어컨을 틀지 못했다. 이번에도 고문 후유증으로 인한 몸살인 줄 알고 참고 지내다 견디지 못해 병원을 찾았다가 뒤늦게 뇌정맥혈전증 진단을 받았다.

트라우마도 그를 괴롭혔다. 치아 치료를 받으러 치과에 가서 누웠다가 고문 당시 생각이 떠올라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설 정도였다.

말이 어눌해지고 몸놀림이 둔해진 것도 고문 후유증이다. 측근들은 김 고문이 투병한 파킨슨병도 고문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그는 생전에 고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길 꺼렸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고문을 받은 사람이 나 혼자만이 아니고 군사독재 때 많은 사람들이 고문받고 목숨까지 잃었다”며 “그분들의 희생에 비해 김근태는 보상을 받았는데 다른 분들은 그렇지 않은 측면이 많이 있어 자세히 얘기하는 게 부담이 있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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