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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년전 조봉암 간첩혐의 무죄선고 유병진 판사

53년전 조봉암 간첩혐의 무죄선고 유병진 판사

입력 2011-01-24 00:00
업데이트 2011-01-24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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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일 죽산 조봉암 선생의 재심에서 대법원이 간첩죄와 국가보안법 위반 등 주요 혐의를 무죄로 선고한 것을 계기로 이미 50여년전 1심 재판에서 간첩 혐의를 무죄로 선고했던 고(故) 유병진 판사(1914-1966)가 재조명받고 있다.

 1958년 조봉암 선생 1심 재판의 재판장이었던 유 판사는 “조씨 등이 북의 지령을 받고 이에 호응했다거나 간첩과 밀회했다”는 등의 공소사실은 인정되지 않는다며 간첩혐의를 인정하지 않고 국가보안법 위반과 불법무기 소지만을 인정해 징역 5년을 선고했다.

 이 판결은 당시 큰 파장을 일으켜 “용공판사를 타도하라”는 시위대가 법원 청사 안으로까지 난입하기도 했으며 유 판사는 결국 그해 말 법관 재임용에서 탈락했다.

 그는 2년뒤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조씨가 받았다는 돈을 북한이 보내왔다고 인정할 만한 증거가 전혀 없었다”며 “내가 선고한 징역 5년이라는 것도 마음 아픈 판결이었다.그 판결은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유 판사는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과를 졸업한 뒤 1946년 사법요원양성소 입소시험에 합격해 1949년 서울지방법원 판사,1951년에는 서울고등법원 판사로 임명됐다.

 재판관으로서 그의 깊은 고민은 1950년 부역자처벌법 위반 사건의 재판에서 시작했다.

 6·25 전쟁 발발후 이승만 대통령은 긴급명령 1호를 발령해 ‘적에게 정보를 제공하거나 안내’ 등을 하면 증거설명없이 단심 재판으로 사형,무기,징역 10년이상의 형으로 처벌할 수 있도록 했던 것.

 9·28 서울수복 후 이 법이 실제로 적용돼 재판이 시작되자 유 판사도 처음에는 피고인들에게 사형 등 중형을 선고했다.

 그런데 만14세의 소년이 인민군 내무서(파출소) 직원에게 동네 사람들의 집 위치를 알려준 혐의로 기소된 사건을 맡게 되자 “이 정도 연령과 교육수준의 소년이 괴뢰군에게 협력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변별할 능력이 없고 설사 있을 수 있다고 해도 그런 의식을 기대할 수는 없다”며 무죄를 선고한다.

 이에 대해 동아대 로스쿨의 허일태 교수는 지난해 ‘유병진 판사와 그의 법사상’이라는 논문에서 “오늘날 일반화된 ‘기대가능성 이론’을 적용해 해당 법률의 부당성을 극복할 수 있는 이론적 토대를 세웠다”고 평가했다.

 유 판사는 집주인이 피난간 사이 고추장을 훔쳐 먹었다는 이유로 기소된 절도범에게도 무죄를 선고해 풀어줬다.당시 비상사태하에서 절도는 평시와 달리 사형,무기,10년 이상의 징역으로 처벌됐다.

 그는 이 판결 이후 지인에게 “난리통에 남의 고추장을 훔친 것이 징역 10년을 살만한 큰 죄인가.법과 현실의 간격을 판사가 메울 수 없고 법의 노예가 돼야 한다면 나는 판사를 그만두겠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 판사는 또 필화사건으로 기소된 류근일 전 조선일보 주필에게 무죄를 선고했다고 한다.

 서울대 정치학과에 재학중이던 류 전 주필이 1958년 서울대 교내신문에 ‘모색-무산대중을 위한 체제로의 지향’이라는 글을 썼고 검찰은 이 글과 류 전 주필이 가입한 문리대생 모임인 ‘신진회’를 문제삼아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기소했다.

 검찰은 “북진통일이나 실지회복이 아닌 남북간 협상이나 제헌국회소집에 의한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것은 대한민국이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부정하는 것으로 국가보안법 위반”임을 주장했으나 유 판사는 “북한괴뢰집단의 평화공세에 야합했다는 증거가 없는 이상 이들의 행위는 정치연구목적 범위 내에 있다”고 판단했다.

 이처럼 권위주의 정권 시대에서 정의가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판결로써 실천한 유 판사에게 후대의 법학자들은 ‘양심의 화신’으로 찬사를 보내고 있다.

 유 판사가 생전 발표한 논문 등을 모아 ‘재판관의 고민’이라는 책을 출간한 서울대 로스쿨의 신동운 교수는 “광기에 가까운 여론의 압력 속에서도 법적 정의의 핵심에 다가서려고 했다”고,‘한국의 법률가’를 쓴 최종고 서울대 로스쿨 교수는 “시대를 앞서간 형사법학자이자 사법권의 독립을 지킨 법철학자”라고 평가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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