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막 8곳 흔적 없고 송전탑 일련번호 말뚝 세워져주민 “국가만 살고 국민은 죽으면…”, 한전 “연말 완공”
경남 밀양 주민들이 송전탑 공사 저지 거점으로 삼았던 농성장 강제 철거가 이뤄진 지 하루가 지난 12일 오후.부북면 평밭마을 농성장이 있던 129번 송전탑 공사 예정 부지는 말끔하게 정리돼 있었다.
송전탑 반대 주민들이 지난 수개월간 지키던 농성장의 흔적은 온데간데없었다.
대신 그 자리에는 송전탑 일련번호인 ‘No 129’가 적힌 작은 말뚝이 박혀 있을 뿐이었다.
방호 업무를 맡은 한전의 한 직원은 “농성장이 있던 자리는 정확히 송전탑이 세워질 곳이었다”고 설명했다.
수없이 많은 갈등과 충돌이 벌어져 온 현장에서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한전 직원 19명과 시공사 직원 6명이 분주히 일하고 있었다.
한전은 행정대집행이 끝난 직후부터 부지 주변에 외부인 출입 제한을 위한 높이 2m의 울타리를 치고 부지 정지작업에 들어갔다.
잡목 제거 등을 위해 동원된 굴착기 2대도 바삐 움직였다.
경찰은 농성장 입구와 길목 곳곳에 2개 중대를 배치,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공사 방해 등 사태에 대비하며 한전의 공사를 돕고 있었다.
하루 전까지만 해도 ‘요새’처럼 남아 있던 위양마을(127번) 농성장에서는 남은 쓰레기만이 그 흔적을 짐작하게 했다.
한전 측은 “쓰레기를 수거하고 부지 주변 울타리 설치 작업이 2∼3일 내로 끝나면 터파기 등 공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예정”이라며 “농성장이 있던 나머지 단장면 용회마을(101번), 상동면 고답마을(115번)도 상황은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길게는 4년, 짧게는 수개월간 농성장을 지켜오던 주민들은 지난 11일 행정대집행이 개시되자 불과 1시간여 만에 각 농성장에서 쫓겨났다.
치열한 투쟁 현장이었던 농성장에서 집으로 돌아간 주민들은 허탈함과 상실감을 숨기지 못했다.
이남우(72)씨는 “속이 뒤집힐 정도로 속상하다”며 “민주주의 국가에서 폭력·강압적으로 주민들을 끌어내고 공사를 강행하는 경우가 어디있느냐. 대안은 내놓지 않고 국가만 살고 국민은 죽으면…참 안타깝고 슬픈 일이다”고 토로했다.
다른 주민은 “우리 마음이 어떤지 아무도 모른다”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송전탑 반대 운동을 이끌던 밀양 송전탑 반대 대책위원회는 농성장은 사라졌지만 장외 투쟁은 이어간다는 방침이다.
송전탑 반대 대책위 측은 “공사 중단과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동시에 필요할 경우 법적 소송도 제기할 계획”이라며 “주민들은 분노와 오기로 다시 뭉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주민과 대책위의 반발에도 밀양 구간 송전탑 공사는 향후 완공까지 한전 계획대로 진행될 것으로 전망된다.
한전 측은 “농성장 철거로 유일하게 미착공 상태이던 송전탑 5기 공사를 시작할 수 있게 됐다”며 “전 구간 공사가 순조롭게 진행돼 올해 안으로 완공될 것”으로 전망했다.
한전은 밀양 지역 5개 면에 세울 송전탑 69기 가운데 이미 64기를 완공 또는 착공, 이날 현재 공정률 93%를 기록하고 있다.
한편 경찰은 지난 11일 공무집행방해 혐의로 현행범으로 체포한 3명 가운데 1명은 석방했고 새정치연합 장하나 국회의원 보좌관 최모(42)씨와 주민 배모(59)씨에 대해선 구속영장 신청 여부를 검토하고 있다.
같은 날 행정대집행 과정에서 실신하거나 부상한 주민·시민단체 회원 등 20여 명은 대부분 치료를 받고 귀가했고 박모(70·여)씨만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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