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날줄] 벌(罰)/주병철 논설위원

[씨줄날줄] 벌(罰)/주병철 논설위원

입력 2011-11-25 00:00
수정 2011-11-25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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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제국의 황제 니콜라이1세는 국가를 거대한 병영으로 만든 인물이다. 그는 병사들의 복장과 군사훈련 등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징모한 병사를 훈련하기 위해 물이 가득 찬 컵을 모자 위에 얹고 무릎을 굽히지 않고 걷는 독일 육군 관병식의 걸음걸이로 걷게 했다. 병사들은 컵의 물을 한 방울이라도 흘리면 한 방울에 1년씩 병역의 의무가 더해졌다. 벌(罰)을 무기로 삼은 군사훈련이었다.

원래 罰은 사전적 의미로 ?(꾸짖을 리)에 刀(칼 도)를 덧붙인 한자(漢字)인데, 칼을 들어 위엄을 보이며 꾸짖어 벌을 준다는 뜻이다. ? 역시 그물(四)살처럼 찌푸리고 꾸짖음(言)을 나타내고 있다. R W 에머슨은 수필집에서 벌을 이렇게 정의했다. “죄와 벌은 같은 줄기에서 자라난다. 벌이란 향락의 꽃이 그 속에 숨기고 있었던 것을 모르는 사이에 익어 버린 과일이다.”

에머슨의 이야기는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죄와 벌’과 다르지 않다. 가난 때문에 대학을 중퇴한 라스콜리니코프는 인정 없는 전당포의 늙은 노인 알료나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인다. 하지만 가족의 생계를 위해 몸을 파는 소냐를 만나면서 그의 양심은 혼란스러워진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수를 시도하지만 실패하게 되고 결국 소냐의 간절한 소원으로 자수를 한 뒤 시베리아로 유배된다. 새로운 사상과 질서가 꿈틀대던 당시 러시아 사회에서 인간이 겪는 갈등과 가치관의 혼란을 ‘살인 사건’이라는 소재를 통해 깊이 있게 다룬 작품이다.

한국판 ‘죄와 벌’의 정수는 1988년 10월 지강헌을 비롯한 미결수 12명이 집단 탈주한 뒤 9일 동안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인질을 잡고 경찰과 대치하다 죽기 전 내뱉은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다. 이 말은 그 무렵 한국 사회의 일그러진 세태를 꼬집는 유행어였다. 물론 벌이라는 게 죗값을 달게 받는 측면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죄가 되거나 잘못돼 감내하는 억울한 벌도 있다.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가 그제 대학생들과의 간담회에서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 패배에 대해 “그동안 부족한 게 많아 벌 받은 것이다. 엄청나게 반성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벌이라는 게 주는 사람이 없어도 받을 만하면 스스로 청해 받기도 하는 모양이다. 노자(子)는 “천벌은 늦게라도 반드시 찾아온다.”고 했다. 박 전 대표가 노자의 생각을 읽어서 그렇게 말했다고 여겨지진 않지만 그래도 자성한다고 하니 지켜봐야겠다.

주병철 논설위원 bcjo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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