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명우의 알고리즘 밖에서] 희귀자본이 된 인간의 글

[노명우의 알고리즘 밖에서] 희귀자본이 된 인간의 글

입력 2026-09-22 23:54
수정 2026-09-23 00:55
  • 기사 읽어주기
    다시듣기
  • 글씨 크기 조절
  • 댓글
    0
1980년대 후반 비장한 각오를 장착하고 석사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사실상 지적 만용에 가까운 자신감을 충전한 채 출발했지만, 그 만용은 글을 쓰기 시작한 지 며칠 만에 수증기처럼 사라졌다.

석사 논문을 쓰는 과정은 모르는 게 얼마나 많은지를 확인하는 진실의 시간이었다.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문법적 오류가 없을 뿐 아니라 뜻도 통하는 문장으로 빚어내는 것, 그리고 그 문장과 문장을 논리적으로 연결하는 게 결코 쉽지 않은 일임을 확인하는 과정과 다름없었다. ‘소크라테스적 무지’를 그렇게 배웠다.

대학교 앞 제본소에서 큼지막한 하드커버로 장정해 금박으로 논문 제목과 글 쓴 사람의 이름까지 적어 넣은 논문을 동료들에게 증정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라면 냄비 받침으로만 사용하지 말아 줘.” 책의 용도는 다양하다. 적당한 두께라면 베개가 없을 때 응급 베개 대용으로도 쓸 수 있고, 그보다 더 무지막지하게 무거운 책은 무엇인가를 평평하게 펼 때 누름판으로도 요긴하게 쓸 수 있다.

그런데 요즘 책에는 그때는 짐작도 못 했던 또 하나의 쓸모가 생겼다. 라면 냄비 받침도, 베개도, 누름판도 아닌 인공지능(AI)을 학습시키는 재료로서의 쓸모다. 앤스로픽이 수백만 권의 실물 종이책을 구매한 뒤 외주 업체를 통해 책등을 잘라내고 고속 스캔 장비에 넣어 디지털화한 후 원본을 파괴해 AI 데이터 학습에 사용했다는 사실이 저작권 침해 소송 과정에서 알려졌다. 중고서점에서 2022년 이전에 출판된 책을 대량 주문하는 특이한 징후도 파악되어 그 경로를 추적해 보니, 대량 주문된 중고책의 도착지는 다름 아닌 AI 개발회사였다고 한다.

왜 2022년 이전의 책이었을까. 챗GPT가 등장한 2022년 11월 이후, 웹에 새로 쌓이는 글의 상당량은 생성형 AI가 쓰거나 손을 댄 문장이다. AI를 AI가 만든 글로 학습시키면 오류와 상투어가 대물림되며 품질이 열화되는 ‘모델 붕괴’ 현상이 일어난다. 그러니 사람이 직접 쓰고 편집자가 다듬은 2022년 이전의 문장이 담긴 책은 희귀자본이 되었고, AI 개발 회사는 그 희귀자본의 가치를 간파한 것이다.

대학에서 글을 대신 써 주는 ‘자동 글쓰기 기계’인 생성형 AI를 사용하기 시작한 지 불과 몇 년 사이에 교수는 논문을 쓸 때, 학생은 쓰기 싫은 과제를 대신 쓰게 하려고 이 기계를 사용하고 있다. 기계가 제법 글을 잘 쓰지만, 기계가 쓴 글은 티가 난다는 지적이 늘어나자 이제는 기계가 쓴 글을 마치 인간이 쓴 것처럼 포장해 주는 AI 서비스까지 등장했다. 신성장 산업다운 재빠른 응용력이다.

우리는 갈림길에 서 있다. 책 대신 읽고 요약해 주고 글까지 자동으로 써 주는 기계에 더 의존할 것인가. 아니면 2022년 이후 희귀자본이 된 인간의 노력만으로 글을 쓰는 능력 배양을 고등교육의 차기 도전 과제로 삼을 것인가. 인간의 종말이라는 괴담이 기분 나쁜 예지몽이 아니라 현실이 되는 것을 막으려면, 당신은 어느 길을 택할 것인가.

노명우 아주대 경제정치사회융합학부 교수

이미지 확대
노명우 아주대 경제정치사회융합학부 교수
노명우 아주대 경제정치사회융합학부 교수
2026-09-23 26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close button
많이 본 뉴스
  • 2026 아이치 나고야 아시안게임
  • 1 / 3
    광고삭제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