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필원 한남대 건축학과 교수
근대기 이후 인류는 약 1만년 전 신석기시대에 시작한 정착생활에서 벗어나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겨 다니고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혹은 꿈을 따라 조상 대대로 살아온 마을과 집을 떠나 먼 곳에 가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20세기 후반의 급격한 도시화와 대규모 재개발로 많은 사람들이 농촌 혹은 도시에 있는 옛집을 떠났다.
무슨 일이든 한 번 해 보면 다음은 쉽다. 집을 한 번 떠난 사람은 쉽게 또다시 집을 옮긴다.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 사회에서는 황당하게도 이사가 가장 수익성 좋은 경제활동이었다. 따라서 정착이라는 말은 점점 낯설어지고 새로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원주민이라는 말이 일상생활에 등장했다. 이렇게 한 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 현대인의 모습은 사냥 도구 대신 디지털 기기를 들었을 뿐 유목민과 다를 바 없다.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는 유목민은 자유로운 대신 하나의 큰 문제를 안게 된다. 자신이 누군지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일관되게 인식하는 자기 정체성이란 내가 오래 거주한 장소, 그리고 내가 속한 지역공동체와 밀접하게 관련되기 때문이다. 영혼이 육체에 관련되듯 정체성은 존재의 물리적 환경에 관련된다. 자신의 기억이 새겨진 집, 그리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장소인 마을이 없이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유목민이 된 우리가 역사상 어느 시기보다도 오래된 집을, 그 집이 속한 마을을 그리워하는 것은 자신을 알고 싶은 욕구 때문으로 보인다. 역설적으로 우리는 오래된 집을 떠남으로써 비로소 집과 마을이 무엇인지, 왜 소중한지 인식하고 이해하게 됐다. 이런 인간 본연의 욕구 앞에 그곳에 이르는 데 몇 시간이 걸리는지, 얼마나 지루하고 힘든지는 사소한 문제일 뿐이다.
설에 찾은 고향의 옛집은 오랜 기억을 일깨워 준다. 마을 입구의 정자나무, 집으로 올라가는 골목, 마당, 우물, 흙바닥의 부엌, 온돌방, 마루, 다락, 집 옆 채소밭까지 곳곳에 나의 쓸쓸하거나 명랑한 기억이 묻어 있다. 오랜만에 집을 한 바퀴 둘러보자면 기억들이 도깨비 바늘이 되어 내게 달라붙어 내가 누구인지, 내가 무엇을 잃고 있는지 일깨워 준다.
세상과 맞서느라 잊고 있었던 것들을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은 언제나, 세상으로부터 물러나 있는 듯한 고향의 옛집에서이다. 내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그 소중한 장소에서 오랜만에 자신으로 돌아온 나를 발견하고 모처럼 안도한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새집보다 허술하고 작은 오래된 집에서 나는 더욱 보호받는 듯하다. 명절에 돌아온 옛집은 세상으로부터 거센 공격을 받을 때, 바깥의 바람이 차가울 때 더욱 따뜻한 곳이 되어 나를 감싼다.
우리는 다시 오래된 집을 나서 거친 세상 속의 새집으로 갈 수밖에 없다. 그것이 유목민의 숙명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이전과 동일하지 않으며 세상 또한 전과 같지 않다. 내가 변하면 내가 인식하는 세상도 변하는 법이다. 실제로 또는 상상 속에서 옛집을 찾은 우리는 한층 좋게 바뀌었을 것이다. 미국의 농부 작가 웬델 베리가 말했듯이 소중한 장소로 되돌아감으로써 우리의 부분성과 유한성에 대해 새롭고 올바르게 깨달을 수 있었고 서로에 대한 사랑과 희망을 새롭게 인식하면서 치유와 기쁨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순진함과 공포, 슬픔은 알 수 있을지라도 비극과 기쁨, 위안, 용서 또는 속죄는 알 수 없었으리라.
2017-01-31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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