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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로의 아침] 고사리 교훈/최병규 문화체육부 전문기자

[세종로의 아침] 고사리 교훈/최병규 문화체육부 전문기자

최병규 기자
입력 2023-04-04 02:42
업데이트 2023-04-04 0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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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규 문화체육부 전문기자
최병규 문화체육부 전문기자
검찰 수사 공무원이던 대학 동창 K가 제주로 발령받은 건 4년 전 봄이다. 당시 온갖 성인병으로 몸이 부실했던 그는 제주에 첫발을 들인 뒤 한 가지 철칙을 세웠다.

3년 임기 동안 한 주도 빼먹지 않고 제주의 오름(새끼화산)들을 섭렵하겠다는 비장한 각오였다. 제주의 오름이 어림잡아 360여개이고 1년이 52주이니, 한 주에 두세 개의 오름을 올라야 한다는 계산에 잠시 멈칫했지만 ‘그의 각오’를 응원할 수밖에 없었다.

2년이 흐른 지지난해 봄, K는 한 가지 소식을 더 전했다. 1년을 남기고 명예 퇴직을 할 것이라는 것, 그리고 제주에서 은퇴 후 남은 생을 계획할 것이라는, 어찌 보면 흔하디흔한 제주발 소식이었다. 그러면서 K는 자신에게 약속한 대로 두 해 동안 100여개 남짓한 오름들을 오르다 주변에서 자라는 고사리의 생태에 제법 관심을 가지게 됐다고 덧붙였다. 그 전까지는 생김새가 비슷한 고비와 고사리를 구별조차 하지 못하던 그였다.

K의 말을 빌리면, 고사리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 불릴 만큼 오랜 시간 지구의 역사를 지탱해 온 식물이다. 나이는 4억 살로 추산된다. 고사리는 미역처럼 바다에 사는 조류, 물가에 자라는 이끼인 선태류 다음으로 지구상에 나타난 양치류 식물군이다. 물을 벗어나 생명체가 땅 위에서 자라나기 시작할 때 마치 ‘척탄병’처럼 등장했다는 게 K의 설명이다. 그런데 땅 위 환경은 척박했다.

강한 햇볕은 몸속 수분을 말렸고, 번식에 필요한 물조차 얻기 힘들었다. 하지만 고사리는 환경에 적응했다. 뿌리와 줄기, 잎에 물과 양분을 수송하는 관다발을 만들었는데, 이 관이 자신을 지탱해 주며 키를 더 키울 수 있었고 햇빛 경쟁에서도 우위를 점했다.

수정 대신 스스로 포자를 만들어 땅 위에 흩뿌리는 방법으로 종족을 퍼뜨렸다. 새로운 처지와 환경에 적응하고 조화를 꾀하는 유연함이야말로 4억년이 넘는 자신과 지구를 지탱해 온 고사리가 은퇴를 앞둔 세대에게 주는 교훈이 아닐까 하는 것이 K의 결론이다.

한국에서 자생하는 고사리 종의 80%는 제주도에서 자란다는 게 통설이다. 해마다 벚꽃이 필 무렵 제주 고사리도 아기손 같은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다. 3월 말에서 4월 중순까지 자주 내리는 보슬비는 ‘고사리 장마’로 부른다. 고사리는 이제 귀한 몸이다. 이때쯤이면 전남 목포 등지에서 직업 고사리꾼들이 배를 타고 제주로 몰려든다. 해마다 치솟는 고사리값 때문에 제주 중산간에 널려 있는 고사리밭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중국 상나라의 마지막 충신이었던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나라가 망한 뒤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다 죽었다지만 먹을 것이 귀했던 옛날 제주 중산간 하교에는 아이들이 고사리를 마음 놓고 꺾을 수 있도록 ‘고사리 방학’도 있었다니 고사리는 구황(救荒) 역할도 했음이 분명하다.

고사리는 따는 게 아니라 ‘꺾는다’고 얘기하는데, 절반쯤 꺾어야 적절하다. 뿌리 가까운 곳까지 내려 꺾으면 질겨진다. 욕심이 과해지는 것을 경계하는 ‘중용’의 미덕을 고사리가 품고 있는 것이다.

고사리는 또 서서 보면 안 보이지만 앉아서 살피면 눈에 들어온다. 고개를 꼿꼿이 세우는 것보다 기우뚱하게 꺾어 보면 더 잘 보인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없던 것이 밑에서 올려다보면 있다. 사물을 보는 시각의 다양성까지 고사리는 일러 준다.

무엇보다 찾겠다고 눈에 불을 켜면 안 보이지만 마음을 비우면 보인다. 동창 K가 설파한 것 외에도 고사리가 주는 교훈은 무궁무진하다.
최병규 문화체육부 전문기자
2023-04-04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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