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녀를 위해 누나를 위해 돌아온 건반, 정명훈

손녀를 위해 누나를 위해 돌아온 건반, 정명훈

입력 2013-12-25 00:00
수정 2013-12-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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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향 예술감독 첫 피아노 독주 앨범 발매

“한번 시작하니까 계속 치게 되네요(웃음).”

마에스트로 정명훈(60)이 피아니스트의 자리에 다시 섰다. “이젠 나 자신을 피아니스트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해 온 그였지만 악기 앞에 서니 ‘태생’은 속일 수 없었다. 스며드는 달빛처럼 고아하게, 몰려오는 폭풍우처럼 격정적으로 피아노를 부리는 솜씨가 천생 피아니스트였다.

거장은 ‘손녀 바보’
거장은 ‘손녀 바보’ 천하의 정명훈도 손녀 이야기를 꺼낼 때면 절로 함박웃음을 짓는 ‘손녀 바보’ 할아버지다. “아직 한 살도 안 된 아이가 ‘베토벤 심포니 5번’을 몇 번이고 듣더니 ‘빠빠빠뿡’ 하는데 얼마나 신기하던지요.”
안웅철 사진작가 제공
100여명의 오케스트라 단원을 이끄는 정명훈 서울시립교향악단 예술감독 겸 상임지휘자가 24일 오롯이 피아노 한 대와 독대했다. 그의 첫 피아노 독주 앨범 발매를 기념하는 간담회 자리에서였다.

이 자리에서 그는 슈만의 ‘아라베스크’, 모차르트의 ‘작은 별 변주곡’ 등 앨범을 채운 10곡 가운데 9곡, 이번 앨범에서 빠진 쇼팽 발라드 1번까지 10곡을 내리 연주했다. 슈베르트의 곡을 칠 때 “조용한 곡이니 1~2분간은 사진 찍는 걸 멈춰 달라”고 주문하거나, “손가락이 안 풀렸다”며 긴장된 얼굴로 손을 쥐었다 펴는 모습은 영락없는 피아니스트였다.

정명훈은 스물한 살이던 1974년 차이콥스키 콩쿠르 2위 입상 이후 피아노 솔로 음반 녹음 요청을 쉴 새 없이 받았다. 하지만 그는 늘 “준비가 덜 됐다”며 한사코 거절해 왔다. 그러나 이번 음반만은 내치지 못했다. 독일 음반회사 ECM 프로듀서로 일하는 둘째 아들 정선(31)씨가 제안한 데다 두 손주 등 가족을 위한 앨범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피아니스트로 나선 음반은 전혀 아니다”고 전제하며 “우리 손녀들을 위해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제가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말을 피아노를 통해 건네고 싶었다”고 했다.

그래서 이번 앨범의 10곡은 정명훈 인생의 빛나는 순간들과 맞닿아 있다. 드뷔시의 ‘달빛’은 달이라는 뜻의 이름을 지닌 둘째 손녀 루아에게, 차이콥스키의 ‘가을의 노래’는 40여년 전 차이콥스키 콩쿠르 때 자신을 응원해 줬던 당시 소련 청중에게 바치는 감사의 곡이다.

“‘가을의 노래’는 소련 사람들이 특히 사랑했던 곡이에요. 당시는 콘서트나 라디오로 자기가 좋아하는 곡을 들으면 인생의 하이라이트라고 생각했을 때죠. 콩쿠르 연주를 이어 가던 당시 소련인들로부터 ‘우리는 너를 지지한다. 네가 이겼으면 좋겠다’는 메시지를 많이 받았어요. 얼마나 기분이 좋던지….”

쇼팽의 ‘녹턴 C# 단조’에는 누나 정경화(바이올리니스트)를 향한 각별한 애정과 존경을 담았다. “이 곡은 경화 누나와 함께 연주했던 곡이에요. 누나는 불덩어리처럼 뜨거운 열정을 지닌, 제가 한평생 만나 본 음악가 가운데 음악의 열정을 가장 완벽하게 표현해 내는 사람이었어요.”

다시 돌아온 피아노 앞에서 그는 1975년 줄리아드 음악원 지휘과에 입학하면서 피아니스트에서 지휘자로 삶의 방향을 틀었던 당시를 떠올렸다.

“그때 제일 좋아했던 사람이 제 와이프였어요. 피아니스트로 살 때는 하루 종일 방 안에 틀어박혀 피아노하고만 싸웠죠. 와이프보다 피아노를 더 사랑하는 것처럼 살고 말도 전혀 안 하니 그럴 수밖에요.” 죽기 살기로 악기에 매달렸던 청년 음악가는 이제 거장이 되어 연주를 즐기는 경지에 이르렀다. “피아니스트로 살 때는 음이 하나라도 마음에 안 들면 ‘다 실패’라고 생각할 정도로 심하게 매달렸어요. 이제 그런 마음은 다 없어졌죠. 지금은 재미있어졌어요.”

하지만 ‘피아니스트 정명훈’으로 욕심을 내는 눈치도 슬며시 엿보였다. “이번 앨범 작업이 재미있었기 때문에 이다음에 한번 더 할지도 모르겠어요. 그때는 진짜 ‘피아니스트 앨범’으로 낼 거야(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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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2013-12-25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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