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악한 포식자가 된 인간의 민낯

포악한 포식자가 된 인간의 민낯

하종훈 기자
하종훈 기자
입력 2021-01-28 17:04
수정 2021-01-29 04:01
  • 기사 읽어주기
    다시듣기
  • 글씨 크기 조절
  • 댓글
    0

땅끝의 달/정연희 지음/개미/288쪽/1만 5000원

이미지 확대
‘땅끝의 달’ 책표지
‘땅끝의 달’ 책표지
구제역 감염 우려가 있는 돼지들을 살처분하면서 자신이 살처분당하는 듯한 악몽을 꾼다.(‘몰이꾼’) 바닷가에서 쓰레기 치우는 일을 하면서 오염되기 이전의 자연을 그리워한다.(‘땅끝의 달’) 자신이 낳은 아기를 ‘상품’처럼 대하는 미혼모 대신 아기를 키우면서도 오히려 미혼모에게 돈을 뜯긴다.(‘어둠의 한숨’)

올해 등단 64년을 맞은 정연희(84) 작가의 신작 소설집 ‘땅끝의 달’은 인간의 오만과 탐욕에 희생된 주인공들의 삶을 통해 현대사회의 병폐를 조명한다. 환경·축산·미혼모 등 다양한 소재로 쓴 작품을 관통하며 생태계의 균형을 깨뜨리는 인간중심주의와 이기적 인간형을 고발한다.

수록작 ‘땅끝의 달’의 주인공 현서는 사업 실패로 태안 앞바다에서 쓰레기 치우는 일을 한다. 어느 날 자신을 찾아와 환경파괴의 심각성과 절망을 이야기하던 여인은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전남편의 독점욕으로 상처를 품은 여인은 탐욕이 부른 파멸을 투영하는 듯하다.

‘몰이꾼’은 살처분의 고통을 두고 벌어지는 인간들 사이의 차별과 불평등도 예리하게 다뤘다. 축산 공무원 동주가 살생의 지옥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동안 서울에서는 젊은이들이 향락의 열기에 빠져 있다. ‘인간은 돼지보다 더한 식탐에 빠졌다’(128쪽)는 동주의 생각은 힘을 극대화한 인간의 존재론적 몰락을 암시한다.

‘어둠의 한숨’은 아기를 귀여워하는 세탁소 주인 심 권사를 등쳐먹는 미혼모를 통해 인간이 자연을 대하는 폭력적 태도를 보여 주면서도, 혈육이 아닌 아기에게 정성을 쏟는 심 권사에게서 인류애를 향한 희망을 찾는다.

정 작가는 “인간이 포악한 포식자가 됐지만, 인간사 곳곳에서 사금처럼 반짝이는 이야기를 외면하지 못해 오늘도 그 사금을 고르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작품마다 녹여 낸 치밀한 심리묘사는 문단 원로의 연륜을 실감하게 한다. 암울해 보여도 여전히 인간에 대해 희망을 주는 이 단편들이 반갑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2021-01-29 21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close button
많이 본 뉴스
1 / 3
전과자의 배달업계 취업제한 시행령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가요?
강력범죄자의 배달원 취업을 제한하는 내용의 시행령 개정안이 의결된 가운데 강도 전과가 있는 한 배달원이 온라인 커뮤니티에 “속죄하며 살고 있는데 취업까지 제한 시키는 이런 시행령은 과한 ‘낙인’이다”라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가요?
전과자의 취업을 제한하는 이런 시행령은 과하다
사용자의 안전을 위한 조치로 보아야 한다.
광고삭제
광고삭제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