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로열패밀리’ 문헌 한데 모였네

‘조선 로열패밀리’ 문헌 한데 모였네

입력 2011-07-06 00:00
업데이트 2011-07-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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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 개관 ‘장서각’ 수장고 첫 공개

“이거, 참 잘됐네.” 이항증(72) 선생은 꼼꼼했다.

“이곳 전체가 오동나무입니다. 오동나무는 습할 때 물기를 머금고, 건조할 때 물기를 내뿜는 습성이 있습니다. 3층 전시장은 앞으로 더 많은 기증 기탁자료들이 들어올 것을 대비해 천장 높이를 7.5m로 설계했습니다.” 앞서 가던 송순옥 국학자료팀장이 수장고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이 선생은 그 말 하나하나 다 확인해 보려는 듯 수장고 내부를 일일이 손으로 만져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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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신축 개관한 장서각 수장고에서 송순옥 국학자료팀장이 ‘조선 왕실 족보’ 선원록(璿源錄) 편찬과정을 기록한 선원록의궤의 보관상태를 설명하고 있다.  류재림기자 jawoolim@seoul.co.kr
5일 신축 개관한 장서각 수장고에서 송순옥 국학자료팀장이 ‘조선 왕실 족보’ 선원록(璿源錄) 편찬과정을 기록한 선원록의궤의 보관상태를 설명하고 있다.
류재림기자 jawoolim@seoul.co.kr


5일 경기 분당시 하오개로 한국학중앙연구원(한중연)에서 열린 장서각(藏書閣) 신축 개관식.

조선왕실의 모든 문헌이 집대성된 곳이다 보니 한중연은 또 한 가지 야심 찬 계획을 세웠다. 사대부 명문가의 문헌까지 모아 보자는 것. 왕실과 사대부를 합쳐 이른바 ‘조선의 로열 패밀리’를 집대성하겠다는 포부였다. 한중연은 이를 위해 227억원을 들여 장서각을 새로 지었다. 그러면서 고문헌을 기증한 43개 가문 가운데 8개 가문 대표들을 개관식에 초청했다.

이 선생은 이 가운데 한 명이다. 이 선생의 증조부는 석주 이상룡(1858~1932). 석주는 조선이 망하자 경북 안동에 있던 가산을 모두 정리하고 만주로 건너가 우당 이회영과 함께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상하이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인물이다.

때문에 유학을 공부한 조선 선비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 지도층의 도덕적 책무) 전형으로 꼽힌다. 이후 집안은 파란만장했다. 아들 이준형은 일제의 회유와 협박에 내몰리다 결국 1942년 자살했고, 손자 이병화는 친일파와 손잡은 이승만 정권 반대운동을 벌이다가 1952년 숨졌다. 이로 인해 이 선생은 어린 시절 한동안 고아원을 전전해야 했다.

이 선생은 개인적 고난보다 증조부의 유산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있다는 자책감이 더 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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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가 모두 오동나무로 꾸며진 장서각 수장고 안에서 문헌 기탁자들이 문서 보관상태를 살펴보고 있다. 류재림기자 jawoolim@seoul.co.kr
내부가 모두 오동나무로 꾸며진 장서각 수장고 안에서 문헌 기탁자들이 문서 보관상태를 살펴보고 있다.
류재림기자 jawoolim@seoul.co.kr


“고문서를 많이 갖고 있는 분들은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도난, 멸실 걱정이 제일 컸죠. 증조부가 남기신 소중한 자취를 내가 잘못 다루면 어쩌나 전전긍긍이었어요. 증조부가 가산을 정리해 고향을 떠난 뒤 안동 임청각에 제대로 된 주인이 살아본 적이 없어요. 눈에 띄는 대로 가져가면 그뿐이었죠. 그나마 다행인 건 1970년대 중반인가, 일부 유물을 정리해서 고려대 박물관에 기증했습니다. 그게 언론에 보도되니 ‘이제 석주 집에는 더 볼 게 없다’며 도둑도 안 들어요. 그래서 한시름 놨죠. 하하하.”

그래도 결국 장서각 기탁을 결심했다. “솔직히 몇 년 동안 혼자 씨름했어요. 그런데 아무리 그래봤자 이걸 내가 지켜낼 방법이 없겠구나 싶더라고요. 그래서 기탁해버린 겁니다. 그 뒤 한중연에서 어떡하나 봤는데, 기록을 꼼꼼히 해제하더라고요. 동네 어르신이나 먼 친척분들이 그냥 하시는 말씀인 줄 알았던 것이 다 기록에 남아 있다고 하니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장서각이 재정비됨에 따라 한중연은 ‘21세기 장서각 연구사업’을 시작할 방침이다. 1년에 20억원씩, 5년간 100억원의 돈을 들여 보유하고 있는 왕실·사대부 문서를 전부 해제·정리하기로 한 것. 김학수 한중연 국학자료조사실장은 “새로 지은 장서각은 고문헌 보관에서부터 연구, 수리에 이르기까지 원스톱 서비스가 가능하도록 설계됐다.”면서 “갈수록 고문헌 보존이 어려워지는 세상이니 장서각을 믿고 (고문헌을) 맡겨 달라.”고 당부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5일 신축 개관한 장서각 수장고에서 송순옥 국학자료팀장이 ‘조선 왕실 족보’ 선원록(璿源錄) 편찬과정을 기록한 선원록의궤의 보관상태를 설명하고 있다(왼쪽). 내부가 모두 오동나무로 꾸며진 장서각 수장고 안에서 문헌 기탁자들이 문서 보관상태를 살펴보고 있다.

류재림기자 jawoolim@seoul.co.kr

[용어클릭]

●장서각 고종이 황제국을 선포한 뒤 황가의 문서를 한데 모으기 위해 1908년 설립했으나, 일제에 흡수되면서 유명무실해져 버린 기관이다. 요즘 떠들썩한 외규장각은 규장각의 일부이고, 규장각은 이 장서각의 일부이다.
2011-07-06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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