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영 대하소설 ‘객주’ 완결편 <26>

김주영 대하소설 ‘객주’ 완결편 <26>

입력 2013-05-06 00:00
수정 2013-05-06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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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주영 그림 최석운

내성의 어물 도가에 소금짐을 내린 뒤 곽개천으로 하여금 흥정하게 조처하고 정한조는 그곳 임소의 권재만을 찾아갔다. 그는 안동 태생으로 내성 임소의 반수였다. 안동부중 임소와 접소를 합쳐 반수는 그 한 사람뿐이었다. 예순을 넘긴 나이지만 젊은이처럼 정정하고, 시세를 점치는 셈속이 빨랐다. 그만하면 학문도 섬부(贍富)할 뿐만 아니라, 식견도 투철하여 앞일을 요량하는 도리가 범상치 않았다. 성품도 결벽하여 언제 보아도 입성이 깨끗하였다. 그는 특히 도감인 정한조를 매우 아꼈는데 그것은 정한조가 의리를 위해서라면 새옹을 팔아서라도 갚는 성격이란 것을 알고 있었고, 도감임에도 어려움이 닥치면 수하 사람들에게 미루지 않고 언제나 앞장선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정한조는 채수염이 방바닥에 쓸리도록 고개를 숙이며 한훤 수작 나눈 뒤에 이번 행보에 겪었던 일을 차근차근 아뢰었다.


“지난번 울진 포구로 가는 회정길에는 십이령에서 행려병자를 구급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궐자가 본색을 밝히려들지 않습니다.”

“장시를 드나드는 원상이나 길손이 아니었나?”

“본색을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미루어 알아차릴 만한 증빙을 몸에 지니지도 않았지요. 신표나 척문을 지니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 해서 놀고먹는 협잡꾼도 아닌 것 같구요.”

“혜상공국이 설치된 이래 조정에서 신표 대신 상표(商標)를 발행하여 지니도록 조처한 일이 있다고 들었네.”

“그런 것도 보이지 않는 천둥벌거숭이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 짐작가는 것이 있다면 궐자가 적굴에서 뛰쳐나온 산적일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저희들끼리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각축을 벌이다 소굴에서 쫓겨난 처지는 아닌지 의심스럽습니다. 구억터 기슭에서 눈밭 위에 엎어진 위인을 숨 거두기 직전에 발견하고, 업어다가 말래 도방에 구완하라 일렀습니다. 그런데 이번 내성 행보에 샛재 숫막에 들렀다가 수상쩍은 얘기를 들었습니다. 숫막의 주모 말로는, 운수납자 복색의 탁발승이 숫막거리에 잠행하며 궐자의 행방을 수소문하고 다니더랍니다. 명색 탁발을 한다는 스님의 안면이 세속의 횡행하는 시정잡배처럼 험악하고 부랑스러워 섣불리 대척할 수 없었다 합니다. 그래서 모르쇠로 손사래를 쳤더니 불쑥 화증을 내며, 알고 있는 것을 무슨 연유로 모른다고 하느냐며 눈을 부라리고 톡톡히 무안을 주더랍니다.”

“그렇다면, 도감은 눈 속에서 발견하여 구급했다는 사람과 탁발승을 한통속으로 보는군.”

“시생 생각에 한 놈은 소굴에서 각축을 벌이다 세력에 밀려 쫓겨난 놈일 테고, 한 놈은 혹여 있을지 모를 후환을 없애자 하고 탁발승으로 가장해 뒤를 쫓는 와주나 세작(細作)이 아닌가 합니다. 오이는 씨가 있어도 도둑은 씨가 없다는 말은 요즈음의 시절을 두고 하는 말이 분명합니다. 어느 놈이 도둑이고 어느 놈이 농투성이인지 정신 차리고 염탐하지 않으면 도무지 알아챌 재간이 없습니다. 가짜로 만든 첩지나 험표(驗標)를 가지고 원상을 사칭하며 작폐를 저지르는 일은 이미 도를 넘어서지 않았습니까. 심지어 약초꾼이나 길가에서 빈둥거리는 병문친구들조차 부상 행세를 하며 도둑질을 일삼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도둑질한 놈은 잡아다가 이마에 자자를 했다지 않습니까. 그런데 요사이 소굴 놈들은 탁발을 가장하고 다니는 것은 예사이고, 의관을 정제하고 다니면서 양반 행세하고 다니는 놈들도 있습니다. 시생들이 미처 눈치채지 못해서 그렇지 적굴 사람들이 육장 여기저기 나와서 살다시피 하는지도 모르지요.”

반수는 억장이 무너지는지, 침통한 낯빛으로 천장을 쳐다보며 말이 없었다. 이 경난을 뚫고 나간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란 것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눈앞이 캄캄할 뿐이었다. 믿을 사람은 십이령을 넘나드는 울진 포구 소금 상대들뿐이란 생각도 들었다. 당장은 수효로 보나 강단으로 보나 그들만큼 세력을 뽐내는 상단은 안동부중이나 삼척부중에선 찾기 어려웠다.

2013-05-06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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