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로 형 잃은 포토티씨 전 세계 돌며 ‘비폭력’ 호소
10년 전 9월 11일 아침 집에서 커피를 마시던 데이비드 포토티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받고서야 뉴욕 쌍둥이빌딩 북쪽 건물 95층에서 일하던 친형 짐에게 뭔가 심각한 일이 생긴 걸 알았다. 9·11 테러범들이 테러에 이용한 첫 번째 여객기가 들이받은 곳은 바로 짐이 일하는 사무실이었다.데이비드 포토티
테러에 대한 보복으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해 다른 나라에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답이 될 수 없었다. 그는 뜻을 같이하는 다른 유가족들과 함께 2001년 말 워싱턴에서 뉴욕까지 ‘치유와 평화를 위한 행진’을 벌였다.
2002년에는 200여 유가족들이 모여 ‘평화로운 내일을 위한 9·11 유가족회’를 만들었다. 9·11이 그를 평화운동가로 만들었다. 하지만 9·11 유가족들의 눈물을 명분 삼아 ‘테러와의 전쟁’을 벌이던 미국 정부는 정작 이 단체의 목소리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가 보기엔 최근 미국이 겪고 있는 막대한 정부부채 위기도 결국 전쟁이 주된 원인이다.
그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전 대통령의 말을 인용해 “모든 폭탄은 결국 학교 건물이나 병원을 짓는 데 써야 할 예산에서 훔친 장물에 불과하다.”고 꼬집었다.
‘평화로운 내일을 위한 9·11 유가족회’는 지금도 세계 곳곳을 다니면서 비폭력과 평화를 호소하고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평화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그는 “해마다 이맘때면 슬픔과 두려움, 분노로 뒤섞인 격한 감정에 시도때도 없이 사로잡힌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뼈 한 조각으로만 남은 자식을 가슴에 묻어야 했던 어머니가 들려줬던 “지금 우리가 겪는 이 고통을 다른 이들에게 겪게 하고 싶지 않다.”는 말을 떠올리며 슬픔을 이겨 낸다.
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2011-09-09 2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