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묻은 축구화·닳은 유니폼…그리고 박지성의 여유

흙묻은 축구화·닳은 유니폼…그리고 박지성의 여유

입력 2014-05-14 00:00
수정 2014-05-14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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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성은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 흘러넘치는 웃음에서는 후련함마저 느껴졌다. 모든 것을 불태운 사나이의 여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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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성의 축구화
박지성의 축구화 14일 오전 경기도 수원 박지성축구센터에서 열린 ’은퇴 선언 및 결혼 발표 기자회견’에 박지성 선수의 현역 시절 축구화가 놓여 있다.
연합뉴스


14일 지난 25년간 뛰고 또 뛰었던 ‘산소탱크’ 박지성(33)이 은퇴를 선언했다.

수원 박지성축구센터에는 기자회견 시작 1시간 전부터 취재진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박지성은 미리 배포한 보도자료에서 ‘향후 거취와 결혼 계획 등을 발표하는 자리’라고만 공지했다.

그러나 가벼운 걸음으로 회견장에 도착한 기자들은 단상을 보고는 한동안 멍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단상 앞에는 세월의 더께가 묻어나는 10벌의 유니폼이 전시돼 있었다.

’세류국교’라고 가슴팍에 쓰여있는 세류초등학교 유니폼에 이어 경기중학교, 수원공고, 명지대, 국가대표팀, 교토 퍼플상가, 에인트호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퀸스파크 레인저스, 그리고 다시 에인트호번.

박지성과 함께 그라운드를 누볐던 유니폼들이었다.

테이블 왼쪽에는 그가 세류초 축구부에서 처음 신었던 검은색 축구화가 놓여져 있었다.

오른쪽에는 아직 그라운드의 흙이 채 떨어지지도 않은 주황색 축구화와 축구공이 놓였다. 그가 에인트호번에서의 마지막 경기에서 쓴 것들이었다.

주황색 축구화 왼쪽 켤레에는 그의 약혼녀인 김민지 아나운서의 이니셜 ‘MJ KIM’이, 오른쪽에는 ‘JS PAKRK’이 새겨져 있어 눈길을 끌었다.

오전 11시가 되자 이미 은퇴 기자회견임을 직감한 100여명의 취재진 앞에 왼쪽 가슴에 노란 리본을 단 박지성이 부모님을 대동하고 섰다.

굳은 표정으로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묵념을 마친 박지성은 이내 쑥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은퇴를 선언했다.

박지성은 “특별히 후회되는 것은 없다. 단지 부상을 안 당했더라면 하는 생각은 있지만 은퇴하게 돼서 섭섭하거나 눈물이 나지는 않는다”고 했다.

이어 “어젯밤에 눈물이 나지 않아 ‘기자회견장에서는 눈물이 날까’ 하는 생각을 했다”면서 “그런데 역시 오늘도 눈물이 안 나온다”며 씩 웃었다.

1시간 가까이 질의응답에 응하면서도 박지성은 단 한번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세계 최고의 명문팀에서 아시아 선수로서 이룰 것을 다 이룬 그는 현역 생활에 조금의 미련도 남지 않은 것 같았다. 선수 생활 내내 괴롭혔던 무릎 부상의 고통에서 자유로워졌기에 후련함마저 느끼는 듯했다.

기자들과의 문답이 끝나자 김민지 아나운서가 단상 위로 올라왔다. 사회를 맡은 박문성 SBS스포츠 해설위원은 박지성도 김 아나운서의 ‘깜짝’등장을 예고받지 못했다고 전했다.

평생의 동반자가 될 사람에게서 꽃다발을 안은 박지성은 벌써 새신랑이 된 것처럼 활짝 웃었다. 그리고 제2의 축구 인생을 시작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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