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질’이란 이름의 편견… 적절한 치료땐 혈압·당뇨처럼 정상 생활
간질은 무서운 병이었다. 한번 환자가 생기면 한 집안이 거덜나 한사코 쉬쉬하며 병을 감추려고 했다. 그러는 사이에 환자는 마치 천형이라도 받은 양 숨어 살며 병을 키웠고, 한 사람의 삶이 그렇게 뭉개졌다. 그때는 뇌전증을 간질이라고 했지만 그보다 참담한 병명은 지랄병이었다. 모두가 편견과 무지의 결과였다. 이런 몽매한 인식은 뇌 신경세포의 전기적 결함이라는 의학적 판단이 나오고, 효과적인 치료가 가능하게 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의식 속에 남아 그릇된 인식을 재생산하고 있다. 도리 없이 병명까지 바꿔야 했던 뇌전증을 두고 분당서울대병원 뇌신경센터 박성호·윤창호(이상 신경과) 교수와 얘기를 나눴다.흔히 간질로 불리는 뇌전증은 뇌 신경세포의 전기적 문제 때문에 발생하는 질환이지만 이런 사실을 알기 전에는 ‘나을 수 없는 천형’으로 치부해 수많은 환자들이 고통을 겪었던 병이기도 하다. 사진은 분당서울대병원 뇌신경센터 박성호(가운데)·윤창호 교수가 환자에게 뇌파검사 결과를 설명하는 모습.
→뇌전증이란 어떤 질환인가.
-뇌신경세포는 일정한 전기적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데 다양한 원인에 의해 이런 전기적 질서가 깨지면 비정상적인 흥분상태가 된다. 이때 보이는 증상을 ‘뇌전증발작’, 이런 질환을 뇌전증이라고 한다.
→새삼 뇌전증에 주목하는 이유는.
-뇌전증은 적절히 치료를 받으면 혈압이나 당뇨처럼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한 질병이다. 그러나 ‘간질’이나 ‘지랄병’이라는 병명에서 보듯 예전에는 무지 때문에 환자에게 낙인찍고 유전적 성향이 강한 선천적 질환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연령별 발병률을 보면 고령에 새로 진단되는 경우도 많다. 수술도 중요한 치료 방법이다. 뇌전증 환자의 30%가량은 약물치료에 반응하지 않는 약물저항성인데, 이런 환자들이 수술 치료를 할 경우 60∼70% 이상이 완치된다. 따라서 수술치료 보다 적극적인 뇌전증 치료에 대한 인식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국내 유병률과 최근의 발병 추이는.
-국내에는 인구 1000명당 4명, 즉 전국적으로 20만명가량의 환자가 있는 것으로 추산되며, 이 중 6만∼7만명 정도가 약물저항성을 가졌다. 연령별로는 소아와 노년에서 발병 빈도가 높은 편이다. 그런가 하면 인구 10만명당 매년 40∼70명이 새로운 환자로 진단된다는 보고도 있다.
→원인은 무엇인가.
-뇌를 침범하는 질환과 사고로 인한 뇌손상이 주요 원인이며, 드물게는 원인을 알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출생 후 영·유아기 때는 분만손상과 뇌의 발달이상·선천성 기형·중추신경계 급성감염 등이, 성인의 경우 뇌졸중과 치매·외상·뇌종양·중추신경계 감염 등이 대표적 원인이다. 또 민물고기 등을 날로 먹었다가 뇌에 기생충이 침범해 발생하기도 한다.
→각 단계별로 증상은 어떻게 나타나나.
-발작 증상은 뇌전증의 원인에 따라 매우 다양한데, 크게 부분발작과 전신발작으로 구분한다. 부분발작은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나타나는 증상으로, 한쪽 손이나 팔을 까딱거리거나 입꼬리가 당겨지는 운동발작, 얼굴과 팔다리 한쪽에 이상감각이 나타나는 감각발작, 가슴이 두근거리고, 털이 곤두서거나 땀을 흘리는 자율신경발작, 갑자기 예전 기억이 떠오르거나 과거의 물건·장소 등이 친숙하게 느껴지는 정신발작 등이 있다. 또 의식 손상과 함께 갑자기 어딘가를 멍하게 쳐다보거나, 입맛을 다시고 물건을 만지작거리는 등 의미없는 행동을 반복하는 부분발작 증상도 흔하다. 전신발작으로는 발작 초기에 갑자기 정신을 잃고 호흡곤란·청색증·근육 수축이 나타나 몸을 떠는 전신강직간대발작, 갑자기 행동을 멈추고 어딘가를 응시하거나 고개를 떨어뜨리는 증세가 5∼10초 정도 지속되는 소발작, 불규칙한 근수축으로 깜짝 놀라는 듯한 반응을 보이는 간대성근경련발작, 근육의 긴장이 풀려 길을 걷다 갑자기 넘어지는 무긴장 발작 등이 있다.
→진단은 어떻게 하며, 진단 기준은.
-진단에서 중요한 것은 임상 양상이다. 뇌전증 증상은 대부분 돌발적으로 나타나며, 지속 시간도 1∼2분에서 길어야 5분 이내이고, 양상도 비슷하다. 따라서 전조증상의 유무와 형태, 발작 양상, 발작 후 임상증상과 두통, 수면 등에 대한 정보가 중요하다. 이 밖에 뇌전증의 유발 요인, 다른 질환의 병력과 가족력, 열성 경련이나 외상병력 등을 확인해야 한다. 이런 증상과 함께 비유발성 발작이 24시간 간격을 두고 2회 이상 발생하면 뇌전증으로 진단하는데, 이때 뇌파검사나 CT(컴퓨터단층촬영), MRI(자기공명영상) 등을 통해 최종 확인한다. 뇌전증 진단에는 뇌파검사가 중요하지만 뇌전증파가 나오지 않는다고 뇌전증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 없다. 발작 상태가 아니면 뇌파가 정상으로 잡히기 때문인데, 실제로 환자의 30∼40%는 처음 시행한 뇌파검사에서 음성으로 나타나며, 정상인도 1∼2%에서는 뇌전증파가 나타난다.
→중증도에 따라 치료는 어떻게 하는가.
-치료는 약물치료·수술치료·전기자극기 치료 등으로 이뤄진다. 가장 일반적인 치료는 약물치료로, 환자 60∼70%의 발작을 조절할 수 있다. 수술치료를 고려할 때는 먼저 약물저항성 여부를 가려야 하는데, 일반적으로 2년 동안 최소 2가지 이상의 약물을 충분히 투여했음에도 재발된 경우 약물저항성으로 본다. 이 경우 수술치료가 가능하다고 판단되면 발작의 병소를 찾아 수술을 진행한다. 이 밖에 미주신경이나 대뇌 심부에 전기자극을 가하는 방법도 있다.
→치료 예후는 어떤가.
-약물치료에 반응하는 60∼70%를 제외한 나머지 30∼40%는 약물저항성 뇌전증에 속하지만 이들이 모두 수술치료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어서 다시 수술 가능성을 따져야 한다. 수술은 뇌전증의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결과가 다른데, 대표적 부분발작인 측두엽뇌전증의 경우 65∼85%까지 완치가 가능하며, 그 밖의 부분발작은 40∼60% 정도의 성공률을 보인다.
→뇌전증과 관련된 정책적 문제는 없나.
-만성 뇌질환인 뇌전증은 사회적 차별과 편견으로 일상생활이 어려운 만큼 약물저항성 환자에 대한 산정특례 적용이 절실하다. 또 수술치료의 경우 검사 전 평가와 병변 국소화에 큰 비용이 든다는 점, 뇌전증에 대한 장애판정 기준이 2∼4등급으로 매우 예외적이고 엄격하다는 점 등도 개선할 필요가 있다.
심재억 전문기자 jeshim@seoul.co.kr
2013-05-06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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